'거미집'처럼 견고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지닌 매력은? [TEN스타필드]
이하늘 2023. 9. 15. 21:16
'조용한 가족'으로 1998년 데뷔
늘 새로움에 도전하는 감독
'거미집' 만큼이나 견고한 작품 세계
≪이하늘의 롱테이크≫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겸 영화평론가)가 한 호흡으로 화면을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처럼, 영화 속 장면이나 영화 이야기를 심층 분석합니다.
2003년,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부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까지. 현재 내로라하는 거장들은 이때 자신들의 세계관을 넓혀갔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거미집'의 김지운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1970년대 영화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한 '거미집'은 김 감독(송강호)과 자신의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다시 찍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졸작'이 아닌 '걸작'이 되기 위해선 순종적인 이민자(임수정)이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탄생하는 결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태프와 배우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이미 다 찍은 영화를 다시 찍자니? 이틀 동안, 결말을 다시 찍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미집'은 날 것 그대로의 민낯을 보여준다.
세트장 뒤편에서 몰래 사랑싸움을 하는 한유림(정수정), 강호세(오정세)은 불륜관계고, 유일하게 김 감독을 지지하지만 불같은 성미를 지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작사 신성필림의 후계자 신미도(전여빈)과 김 감독의 행보가 못마땅한 베테랑 배우 오여사(박정수)는 아비규환인 촬영장 안에서 나름의 목적과 이유로 결말을 찍어간다. 특히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내용은 촬영 현장과 겹겹이 포개진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 무능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이민자가 인간으로서 본성을 되찾는 것처럼, 김 감독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믿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꿋꿋이 결말을 찍어간다. 영화 검열이 있던 당시의 시대상은 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지하거나 힘을 실어주지 않는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스승 신상호(정우성) 감독의 환영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자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까치집 머리에 커다란 바바리코트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김 감독에게서 자꾸만 '하녀'(1960),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9)의 김기영 감독이 연상되는 것은 사실이다. 김지운 감독은 1970년대의 열악한 상황을 덧입혀 감독으로서의 고민했던 자기 모습을 김감독에게 투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거미집'은 소위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들에 의한 영화로만 읽힐 우려도 있다.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허우적대는 김 감독의 광기처럼 '거미집'이 그려낸 영화 제작기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 읽힐지는 미지수다. 9월 27일 추석 연휴에 맞춰서 개봉하는만큼 주요 관객층이 전연령층이라는 것을 되짚어봤을 때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집'은 신선하다. 우리는 늘 정제되고 편집된 세상 안에서 살고 있다. 가상의 세계 SNS에서 고른 사진도 사회적 이미지도 그렇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총 촬영시간 중에서 실제로 관객들이 보게 되는 시간은 2시간 가량. 그외에 장면들은 편집되고 잘려나간다. 스크린 뒤에 검은 장막에 가려진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거미집'은 예술가가 완성하고자 한 영화로도, 단면 뒤에 가려진 처절한 욕망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되짚어보면, 김지운 감독은 늘 그랬다. 1998년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하던 당시에도 '과연 관객들에게 먹힐까?'라는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조용한 가족'은 안개 산장을 운영하던 가족이 자살한 손님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를 덮기 위해서 애쓰다가 벌어지는 B급 코미디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물과 산장로 등산로 공사 탓에 묻어둔 시체가 발각될 위기에 놓인 가족들은 이제 조용한 삶을 살 수 없다. '조용한 가족'이 재밌는 지점은 이들이 저지른 죄가 아닌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어 삶이 송두리째 변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김지운의 코미디는 "학생 고독이 뭔지 아나"라는 물음에 "저 학생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조용한 가족'의 송강호의 대사처럼 특유의 말맛과 '반칙왕'(2000)에서 은행원 임대호(송강호)가 레슬링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김지운 감독은 늘 억울하고 답답함이 해소되지 못한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조용한 가족'에서 산장을 운영하던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자살에 곤경에 빠지고, '반칙왕'에서 은행원 임대호는 상사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달콤한 인생'(2005) 역시 강 사장(김영철)에 인생을 바쳐 충성하던 조직원 선우(이병헌)는 보스의 애인 희수(신민아)를 감시하다가 오해가 생기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악마를 보았다'(2010)는 끔찍하게 살해된 애인의 복수를 위해 연쇄 살인범 장경철(최민식)에게 찾아가 고통을 안겨주는 수현(이병헌)의 이야기다. 수현의 복수를 끝내더라도 마주하는 것은 약혼녀가 죽었다는 사실 뿐이다. 뒤엉킨 감정의 실은 풀리지 않고 통쾌한 감정 대신 씁쓸함만이 감돈다.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복수를 마치고 홀로 걸어오는 수현이 울부짖는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막 장면이 명장면이라 꼽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해소되었을지 모르나 수현의 분노는 평생 가슴 한 켠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강사장에게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순간처럼 말이다. 끝없이 죽이고 복수를 해도 공허한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거미집' 역시 마찬가지다. 엔딩에서 카메라는 결말을 바꿔 완성한 영화에 손뼉을 치는 사람들과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는 김 감독의 미디엄 샷을 보여준다. 촬영 내내, 세트장 이곳저곳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과는 달리 김 감독의 표정은 모든 것이 소진된 표정이다. '걸작'이 탄생했음에 기뻐하기보다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한계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김지운의 캐릭터들은 그렇기에 끝에 다다라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밀정'(2016)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가려졌지만, 본질은 같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 정출(송강호)은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을 캐려다가 오히려 동화된다. 의열단의 비밀 임무를 도와주게 된 이정출은 박쥐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하지만 폭탄을 실어 온 경성 기차 칸에서 이정출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다. 하시모토(엄태구)로부터 김우진을 구해내고 사건 자체를 덮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정출은 못 다한 폭탄 테러를 제 손으로 한 뒤에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온다. 희생에서 비롯된 목표 달성임을 아는 이정출의 표정은 그렇기에 서글프다.
또한 김지운 감독이 구현한 영화 속 이미지는 잊히지 않는 잔상을 만들어낸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수미(임수정)가 살던 한적한 일본식 목재 가옥은 피비린내가 나는 비극의 시작점이다. 동생 수연(문근영)이 옷장 안에서 사고로 죽었지만, 당시 비명을 들었음에도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미는 자꾸만 상상 속의 범인으로 새어머니 은주(염정아)를 지목한다. 그야말로 광기다. 하지만 '장화, 홍련'은 반전을 뒤에 배치하면서 수미가 쫓던 허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생 수연과 호숫가에서 함께 발을 담그고 놀던 아련한 추억이다. 이병우 음악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OST와 함께 홀로 호숫가에 남겨진 수미의 모습은 하나의 사진처럼 기록된다.
공포, 서부극, 코미디, 시대극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김지운 감독은 '거미집'의 김 감독처럼 자신을 한계로 밀어붙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 있는 영역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해서 도전한다. 그래서인지 김지운 감독의 작품들은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달콤한 인생'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악마를 보았다'도 흥행하지는 못했고,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을 실사화한 '인랑'(2018)은 김지운 필모그래피의 첫 도전인 SF였지만 처참한 성적을 낳기도 했다. 그나마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과 '장화, 홍련'이 많은 관객을 모았다.
김지운 감독의 작품이 회자되는 이유는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거미집'의 대중성 관련된 우려도 마찬가지다. 늘 '새로움'에는 불안함이 함께 동반된다. '거미집'이 대중들의 선택을 받을지 여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김지운 감독이 개척한 자신만의 세계는 '거미집' 속 김 감독의 믿음처럼 견고하다. 한 줄이라면 끊어지지만, 반복된 움직임으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거미집처럼 말이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늘 새로움에 도전하는 감독
'거미집' 만큼이나 견고한 작품 세계
[텐아시아=이하늘 기자]
≪이하늘의 롱테이크≫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겸 영화평론가)가 한 호흡으로 화면을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처럼, 영화 속 장면이나 영화 이야기를 심층 분석합니다.
2003년,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부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까지. 현재 내로라하는 거장들은 이때 자신들의 세계관을 넓혀갔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거미집'의 김지운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1970년대 영화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한 '거미집'은 김 감독(송강호)과 자신의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다시 찍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졸작'이 아닌 '걸작'이 되기 위해선 순종적인 이민자(임수정)이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탄생하는 결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태프와 배우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이미 다 찍은 영화를 다시 찍자니? 이틀 동안, 결말을 다시 찍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미집'은 날 것 그대로의 민낯을 보여준다.
세트장 뒤편에서 몰래 사랑싸움을 하는 한유림(정수정), 강호세(오정세)은 불륜관계고, 유일하게 김 감독을 지지하지만 불같은 성미를 지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작사 신성필림의 후계자 신미도(전여빈)과 김 감독의 행보가 못마땅한 베테랑 배우 오여사(박정수)는 아비규환인 촬영장 안에서 나름의 목적과 이유로 결말을 찍어간다. 특히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내용은 촬영 현장과 겹겹이 포개진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 무능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이민자가 인간으로서 본성을 되찾는 것처럼, 김 감독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믿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꿋꿋이 결말을 찍어간다. 영화 검열이 있던 당시의 시대상은 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지하거나 힘을 실어주지 않는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스승 신상호(정우성) 감독의 환영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자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까치집 머리에 커다란 바바리코트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김 감독에게서 자꾸만 '하녀'(1960),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9)의 김기영 감독이 연상되는 것은 사실이다. 김지운 감독은 1970년대의 열악한 상황을 덧입혀 감독으로서의 고민했던 자기 모습을 김감독에게 투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거미집'은 소위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가들에 의한 영화로만 읽힐 우려도 있다.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허우적대는 김 감독의 광기처럼 '거미집'이 그려낸 영화 제작기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로 읽힐지는 미지수다. 9월 27일 추석 연휴에 맞춰서 개봉하는만큼 주요 관객층이 전연령층이라는 것을 되짚어봤을 때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집'은 신선하다. 우리는 늘 정제되고 편집된 세상 안에서 살고 있다. 가상의 세계 SNS에서 고른 사진도 사회적 이미지도 그렇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총 촬영시간 중에서 실제로 관객들이 보게 되는 시간은 2시간 가량. 그외에 장면들은 편집되고 잘려나간다. 스크린 뒤에 검은 장막에 가려진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거미집'은 예술가가 완성하고자 한 영화로도, 단면 뒤에 가려진 처절한 욕망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되짚어보면, 김지운 감독은 늘 그랬다. 1998년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하던 당시에도 '과연 관객들에게 먹힐까?'라는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조용한 가족'은 안개 산장을 운영하던 가족이 자살한 손님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를 덮기 위해서 애쓰다가 벌어지는 B급 코미디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물과 산장로 등산로 공사 탓에 묻어둔 시체가 발각될 위기에 놓인 가족들은 이제 조용한 삶을 살 수 없다. '조용한 가족'이 재밌는 지점은 이들이 저지른 죄가 아닌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어 삶이 송두리째 변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김지운의 코미디는 "학생 고독이 뭔지 아나"라는 물음에 "저 학생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조용한 가족'의 송강호의 대사처럼 특유의 말맛과 '반칙왕'(2000)에서 은행원 임대호(송강호)가 레슬링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김지운 감독은 늘 억울하고 답답함이 해소되지 못한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조용한 가족'에서 산장을 운영하던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자살에 곤경에 빠지고, '반칙왕'에서 은행원 임대호는 상사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달콤한 인생'(2005) 역시 강 사장(김영철)에 인생을 바쳐 충성하던 조직원 선우(이병헌)는 보스의 애인 희수(신민아)를 감시하다가 오해가 생기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악마를 보았다'(2010)는 끔찍하게 살해된 애인의 복수를 위해 연쇄 살인범 장경철(최민식)에게 찾아가 고통을 안겨주는 수현(이병헌)의 이야기다. 수현의 복수를 끝내더라도 마주하는 것은 약혼녀가 죽었다는 사실 뿐이다. 뒤엉킨 감정의 실은 풀리지 않고 통쾌한 감정 대신 씁쓸함만이 감돈다.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복수를 마치고 홀로 걸어오는 수현이 울부짖는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막 장면이 명장면이라 꼽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해소되었을지 모르나 수현의 분노는 평생 가슴 한 켠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강사장에게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순간처럼 말이다. 끝없이 죽이고 복수를 해도 공허한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거미집' 역시 마찬가지다. 엔딩에서 카메라는 결말을 바꿔 완성한 영화에 손뼉을 치는 사람들과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는 김 감독의 미디엄 샷을 보여준다. 촬영 내내, 세트장 이곳저곳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과는 달리 김 감독의 표정은 모든 것이 소진된 표정이다. '걸작'이 탄생했음에 기뻐하기보다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한계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김지운의 캐릭터들은 그렇기에 끝에 다다라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밀정'(2016)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가려졌지만, 본질은 같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 정출(송강호)은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을 캐려다가 오히려 동화된다. 의열단의 비밀 임무를 도와주게 된 이정출은 박쥐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하지만 폭탄을 실어 온 경성 기차 칸에서 이정출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다. 하시모토(엄태구)로부터 김우진을 구해내고 사건 자체를 덮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정출은 못 다한 폭탄 테러를 제 손으로 한 뒤에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온다. 희생에서 비롯된 목표 달성임을 아는 이정출의 표정은 그렇기에 서글프다.
또한 김지운 감독이 구현한 영화 속 이미지는 잊히지 않는 잔상을 만들어낸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수미(임수정)가 살던 한적한 일본식 목재 가옥은 피비린내가 나는 비극의 시작점이다. 동생 수연(문근영)이 옷장 안에서 사고로 죽었지만, 당시 비명을 들었음에도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미는 자꾸만 상상 속의 범인으로 새어머니 은주(염정아)를 지목한다. 그야말로 광기다. 하지만 '장화, 홍련'은 반전을 뒤에 배치하면서 수미가 쫓던 허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생 수연과 호숫가에서 함께 발을 담그고 놀던 아련한 추억이다. 이병우 음악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OST와 함께 홀로 호숫가에 남겨진 수미의 모습은 하나의 사진처럼 기록된다.
공포, 서부극, 코미디, 시대극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김지운 감독은 '거미집'의 김 감독처럼 자신을 한계로 밀어붙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 있는 영역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해서 도전한다. 그래서인지 김지운 감독의 작품들은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달콤한 인생'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악마를 보았다'도 흥행하지는 못했고,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을 실사화한 '인랑'(2018)은 김지운 필모그래피의 첫 도전인 SF였지만 처참한 성적을 낳기도 했다. 그나마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과 '장화, 홍련'이 많은 관객을 모았다.
김지운 감독의 작품이 회자되는 이유는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거미집'의 대중성 관련된 우려도 마찬가지다. 늘 '새로움'에는 불안함이 함께 동반된다. '거미집'이 대중들의 선택을 받을지 여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김지운 감독이 개척한 자신만의 세계는 '거미집' 속 김 감독의 믿음처럼 견고하다. 한 줄이라면 끊어지지만, 반복된 움직임으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거미집처럼 말이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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