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산 넘어 산’인데, 사업장변경 서류도 ‘100% 한국어’라뇨
2009년부터 비영리단체 ‘지구인의정류장’을 설립해 위기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는 김이찬 대표는 최근 한 농장에서 임금체불과 ‘기숙사 사기’를 당한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돕다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김 대표는 이들이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려 했습니다. 고용센터에 가져갈 사업장변경신청서를 미리 작성하기 위해 서식을 내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서류를 뽑아 보니 어려운 용어들이 ‘100% 한글’로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시행령’ ‘고용허가’ ‘권익보호협의회’ 등 한국인도 머리를 싸매야 할 단어들을 이주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김 대표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캄보디아 노동자 중에 한국말 잘 하는 노동자랑 머리 맞대고 다 번역했죠.
-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
김 대표는 서류의 단어들을 캄보디아어로 손수 ‘깨알 번역’해야 했습니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은 특정 사유가 있으면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바꿀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이 정한 사유는 계약 만료 후 갱신 거절, 고용주의 근로조건 위반 또는 부당한 처우 등입니다. 한국은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탓에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임금체불은 정부가 파악한 것만 해도 한 해 1000억원을 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주노동자가 사업장 변경을 하는 건 ‘산 넘고 산 넘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습니다. 고용주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한 고용주가 이주노동자의 ‘이직’을 쉽게 허락해줄 리 없죠. ‘괘씸죄’도 자주 작용합니다.
어찌저찌 고용주가 사업장 변경에 합의해준다 해도 행정처리가 문제입니다. 앞서 보여드린 ‘100% 한글’ 문서는 약과입니다. 김 대표는 고용센터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신청을 “처음부터 잘 받아주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고용주가 주장한 사유와 이주노동자가 주장하는 사유가 다르면, 조사하기는커녕 아예 받지를 않는다니까요?
-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징 대표
김 대표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임금체불을 당한 이주노동자 A씨가 사업장 변경을 하는 경우를 가정해보겠습니다. 고용센터에서는 A씨의 사업장 변경을 처리할 때 고용주의 ‘고용변동신고서’를 먼저 받습니다. 여기서 고용주가 고용 변동 사유를 노동자 책임인 ‘무단 결근’이나 ‘근무 태만’ 등으로 적어 제출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김 대표는 말합니다.
A씨 고용주가 ‘무단 결근’을 사유로 적어 냈다고 해 봅시다. A씨는 이를 모르고 ‘임금체불’ 사유로 사업장 변경 신청서를 써서 고용센터에 가져갑니다. 김 대표는 이 때 고용센터가 ‘고용주의 사유와 다르면 신청이 안 된다’고 안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합니다.
고용주 사유랑 노동자 사유가 다르면 직원이 조사하러 나가야 하니까 귀찮아서 안하고 노동자에게 압박한다고요. 사장님이 체크한 곳에 체크해야 바뀐다고 안내해요. 안 받아버려요.
-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
이 난관을 넘으려면 노동자는 사업장 변경 신청서와 함께 ‘진정서’를 별도로 가져가서 민원을 접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김 대표는 해당 민원의 처리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아 2~3개월 이상씩 기다리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고용주의 성범죄 등으로 긴급히 피난해야 할 때도 이주노동자들은 ‘수사기관과 근로감독관의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으레 듣는다고 합니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주노동자가 하나하나 밟아갈 수 있을까요. 지구인의정류장 같은 단체들이 이들을 돕고 있지만, 단체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어떨까요.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고용주의 부당한 대우를 꾹 참고 일하거나, 도망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거나입니다. 김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고용노동부가 취업 알선자입니다. 근로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사업장을 바꿔야 한다면, 이야기할 곳이 노동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접수부터가 안 되는 거예요. 이러면 사업장 변경 사유를 아무리 세세하게 추가해도 ‘눈 가리고 아웅’이죠.
고용주 서류 없어도 노동자의 민원을 접수하도록 의무를 두고, 조사 등 절차도 처리기한을 명확히 둬야 합니다.
-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
한국 정부는 인구감소와 일자리 불균형에 대응해 이주노동자를 대거 들여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업장별 이주노동자 고용한도를 2배 이상 늘리고, 내년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도 12만명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마주할 현실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이주노동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면 ‘싼 인력을 마음껏 착취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노동부 소관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을 올해 71억800만원에서 내년 ‘0원’으로 전액 삭감했습니다. 노동부는 지원센터의 상담·권리구제 기능을 정부로 옮기고, 올해의 절반 정도 되는 예산으로 사업을 수행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그간 민간 지원센터가 쌓아 온 전문성과 지속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현재 한국 이주노동자 규모는 공식 통계로만 84만명, 미등록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12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 더 알아보려면
윤석열 정부의 ‘이주노동자 대폭 확대 정책’이 가장 먼저 시행된 곳이 있습니다. 인력난에 시달려 온 조선소입니다. 정부는 국민총소득(GNI) 70~80% 수준의 높은 임금을 약속하며 고숙련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정부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을까요? 경향신문은 지난 7월 조선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 물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기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요.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요?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121525001?www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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