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영화에서 찾은 새로움…힙하다, '거미집' [시네마 프리뷰]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작 '거미집'의 대중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질문에 김지운 감독은 "이런 질문을 '조용한 가족' '반칙왕' 때 들었었다"고 말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은 당대 색다른 스타일의 영화로 각광받으며 지금의 김지운 감독을 있게 한 초창기 대표작. '거미집'을 두 영화와 같은 선상에 두고 얘기하는 것은 감독 개인에게 이 영화가 지니는 남다른 의미를 짐작하게 만든다.
지난 14일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국내에서 공개된 '거미집'은 극 중 극이라는 형식과 배우들의 유려한 앙상블, 예술가를 압박하는 70년대 상황을 풍자한 블랙 코미디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특히 이 영화는 그 시대의 영화와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구현하는 데다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어 '뉴트로'(New-tro) 트렌드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힙하다'는 수식어를 달아주고 싶다.
'거미집'의 주인공은 작품을 만들다 세상을 떠난 위대한 연출자 신 감독의 연출부 출신 감독 김열(송강호 분)이다. 평론가들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싸구려 치정극을 만든다"고 씹히는 김열은 검열 때문에 가슴 졸이고, 제작자에게조차 "(걸작 만들 생각 말고)하던 거나 하라"는 핀잔이나 듣는, 피곤하고 지친 영화 감독이다.
그러던 중 김열은 갑자기 이미 촬영이 완성된 자신의 신작 '거미집'의 새로운 결말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고, 거부할 수 없는 영감에 이끌려 기필코 재촬영을 해야겠다며 제작자 백회장(장영남 분)을 설득한다. 하지만 백회장은 새로운 대본은 문공부의 검열을 통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거절하고, 죽은 남편 신감독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신미도(전여빈 분)와 이야기를 해보라고 떠넘긴다. 김열이 새로 쓴 대본을 검토한 신미도는 "카프카가 쓴 괴기소설 같다"며 열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해보자며 배우와 스태프들으 다시 모으기 시작한다.
베테랑 여주인공 이민자(임수정 분)와 바람둥이 남자 주인공 강호세(오정세 분), 젊은 여공을 연기한 신예 한유림(정수정 분), 시어머니를 연기한 오여사(박정수 분)까지. "감독님을 한 번만 도와드리자"는 연출부의 읍소에 하는 수 없이 바쁜 일정 중 시간을 쪼개 모인 배우들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민자는 가련하고 전형적이었던 여주인공의 서사를 전복시킨 내용에는 내심 만족감을 느낀다.
김열은 '거미집'에 감독으로서의 예술혼을 쏟아붓는다.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메인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복수를 감행하고, 이야기는 강렬한 절정으로 치닫는다. 살인과 치정, 복수가 난무하고, 모든 것이 불에 타고 파멸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은 플랑세캉스(plan sequence, 일종의 롱테이크)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촬영하는 등 과감한 시도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유부남 강호세와 불륜 관계인 한유림은 임신한 상태라 신경이 날카롭고, 걸핏하면 "못 찍겠다"며 까다롭게 굴다가 신미도와 싸움이 붙기도 한다. 그 와중에 문공부 박주사가 촬영장에 단속을 나와 모두를 긴장하게 하고, 일본 출장을 간다던 백회장이 돌아와 영화 촬영을 막는다. 난리통 속에서 김열은 주어진 이틀 만에 머릿속에 그려놓은 걸작을 완성할 수 있을까.
영화의 중심을 꿰뚫는 것은 유머다. 70년대 흑백 영화 속에 들어가 특유의 대사 톤으로 "난 거미가 싫어" "너무 무섭고 답답해" 같은 대사를 읊는 임수정과 오정세, 정수정의 모습은 낯선 기시감으로 보는 이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배우들의 탁월한 캐릭터 연기와 앙상블은 마치 시계 태엽처럼 척척 맞아 떨어져 상황에서 비롯되는 코미디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영화 속 등장하는 흑백 영화 '거미집'은 '하녀' '충녀'를 만든 당대 유명 연출자 김기영 감독의 작품들을 오마주한 듯하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기묘한 이야기와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그 때문에 김열 감독을 김기영 감독으로, 그의 선배인 신상호 감독을 신상옥 감독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딱히 캐릭터 속에 두 감독의 개인적인 부분들을 반영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의 상징성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품은 작품은 아니지만, 극 중 극 '거미집'에서나 영화 '거미집'에서나 한 가지 생각해볼 거리를 유추할 수 있다면 '욕망'이라는 테마일 것이다. 욕망이 절저히 억압되던 시대,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려 했던, 비범하지도, 순수하지도, 결백하지도 않았던 한 인간이 스크린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가는 과정과 그 결과물. 이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묘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베테랑 감독의 신선한 신작이다. 제76회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러닝 타임 132분. 오는 27일 개봉.
eujene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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