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철통보안 속 전격 방문’ 공식 깨져…한미 첩보전쟁 막전막후
한미, 전용열차 움직임 실시간 추적…김정은, 우크라 측 테러를 가장 우려
(시사저널=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우리는 김정은과 푸틴의 만남을 '김 빠진 맥주'로 만들었다. 적어도 '전격 회동' 같은 표현을 쓸 수 없게 됐으니까…." 한미 대북 정보 공조를 담당하는 한 정보기관 간부는 9월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이렇게 귀띔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4년5개월 만의 정상회담을 한미가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며 관련 첩보 수집은 물론 모종의 공작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언급이다.
은밀하게 추진된 김정은과 푸틴 회동의 산통이 깨진 건 9월4일 미 뉴욕타임스(NYT)의 보도다. 바이든 행정부 당국자를 인용한 기사는 "김정은이 이달에 러시아 방문을 검토하고 있으며, 장갑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후 푸틴 대통령과 만날 것"이라고 썼다. 9일 후 이 보도는 현실이 됐다.
사실 중국·러시아 방문은 김정은의 단골 깜짝 이벤트다. 철통보안 속에 준비작업을 마친 후 전용열차로 국경을 넘고 언론과 숨바꼭질 같은 추격전을 벌이면서 관심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수법이다. 북한 관영매체가 공식 보도할 때까지 김정은의 동선은 최종 확인되지 않아왔다.
미 당국, 러시아 내부 정보원 활용해 정보 수집
이번에도 물밑 교감은 감쪽같았다. 7월말 평양을 방문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김정은에게 푸틴의 친서를 전달했고, 이를 들고 있는 김정은의 모습이 북한 관영매체에 영상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푸틴이나 군수공장·미사일 일정으로 부산한 김정은의 모습에서 방러 조짐은 포착하기 어려웠다.
NYT 보도로 '9월 중 블라디보스토크'로 북·러 정상회담의 얼개가 맞춰지자 이즈음 열린 동방경제포럼(EEF)이 주목받았다. 하지만 미 정보 당국은 일찌감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김정은-푸틴 만남의 장소로 점찍었다. 대러 첩보망과 북·러 간 교신 감청, 러시아 측의 준비 동향을 종합 분석해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000km 거리의 최신 우주기지를 특정한 것이다. 철도역 관계자와 우주기지 근무자, 극동 지역의 행정 책임자급 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인적 정보인 휴민트(humint)도 한몫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9월10일 오후 평양역 출발 상황은 서울의 한 유력 일간지에 곧바로 기사화됐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김정은 전용열차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한미 정보 당국에 의해 추적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북한의 스텔스 도색과 전파 방해 등으로 구체적인 파악은 쉽지 않아도 김정은이 자고 있는지 회의를 하는지 정도는 단박에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 김정은이 열차를 타고 중국을 경유해 긴 거리를 이동하자 미 정보 당국은 첩보위성을 활용한 감청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정은의 회담 전략과 관련해 북측이 서울 청와대와 전화를 통해 '영변(핵단지)만 내놓으면 대북 제재 해제는 문제없는 게 확실하냐'며 2~3차례 확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는 파리에 체류하던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국제전화로 야한 농담을 하는 걸 미 정보기관이 감청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를 모 국정원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언급해 정보 당국이 발칵 뒤집혔고, DJ가 대노하는 일도 벌어졌다는 게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격추 위험이나 고소공포증 때문에 김정은이 항공편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과 맞지 않는 통념일 뿐이라고 정보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육중한 방탄장갑으로 몸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전용열차는 속도도 느린 편이라 테러의 대상이 되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미국의 추가 대응·시진핑의 반응 주목
김정은이 러시아를 향해 움직이고 있던 9월11일 미 워싱턴포스트(WP)는 '김정은의 호화롭고 느린 열차의 내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는데 하부엔 폭발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탄용 강철판이 보강됐고, 속도는 시속 50km에 불과하다고 상세한 내용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한 관계자는 김정은의 방러 관련 경호·의전 문제를 검토하면서 북한이 가장 걱정한 건 우크라이나 측의 테러 가능성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제거될 경우 러시아 측의 피해와 이미지 타격이 상당할 것이란 측면에서다. 러시아 측도 이런 우려 때문에 철도와 도착·경유 열차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러 정상회담이 끝나면서 이제 관심은 미국에 쏠리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김정은-푸틴의 만남을 연일 비판하며 잇단 경고를 발신해 왔다. 해리스 부통령은 9월9일 "북한이 무기 거래에 응한다면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앞서 6일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무기를 러시아에 공급한 대가를 국제사회에서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미국이 실제 북·러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카드를 내놓지 않는다면 엄포만 놓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채찍을 제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북·러 밀착을 바라보는 시진핑의 냉랭한 시선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에 대해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월12일 "북한 지도자의 러시아 방문은 북·러 사이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정은이 무기 판매를 고리로 푸틴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밀착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만 선을 넘는다고 판단될 경우 엄중한 경고를 보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은이 베이징으로 달려가 시진핑 주석에게 북·중 혈맹관계를 재확인하는 일이 조만간 이뤄지지 않는다면 의외의 상황이 전개될 공산도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교감을 통해 김정은의 행동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거나 한국과 연계해 북한에 견제구를 던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침공이란 수렁에 빠진 푸틴을 상대로 한 김정은의 도박은 이제 신호탄을 올렸다. 포탄과 미사일 등 무기를 주고 우주발사체 기술과 식량을 조달하려는 북·러의 의기투합은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도 격랑을 예고한다. 그럴수록 그 내막을 파헤치려는 주변국의 치열한 첩보전쟁은 열기를 더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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