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 된 여론조사…3류 정치를 만든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1. 2016년 11월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일 오전 뉴욕타임스 인터넷판 기사 제목은 ‘힐러리가 승리할 확률 85%’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예상한 여론조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루 전 발표된 22개 기관의 여론조사 중 20곳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습니다. 일부 언론은 ‘힐러리가 질 수 없는 선거’라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 후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트럼프 후보는 전체 538명의 선거인단 중 과반인 306명을 확보해 232명에 그친 힐러리 후보를 압도했죠. 힐러리의 승리를 믿고 뉴욕의 화려한 행사장에서 승리 연설을 기다리던 지지자들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1930년대부터 과학적 여론조사 기법을 내세워 선거 결과를 예측해온 미국 여론조사 업체들로서는 최악의 실패 사례였습니다. 여론조사 응답자의 ‘샤이 트럼프(Shy Trump)’ 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당황한 미국 여론조사 업계는 반성문을 내놨습니다. ‘미국 여론조사 연합회’는 대선 직후 성명서를 통해 “여론조사가 이번에는 완전히 틀렸다”며 “여론조사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인정했습니다. 이어 “힐러리 지지 수준을 과대평가하고, 트럼프 지지율을 과소평가한 오류를 분석해 대안을 내놓겠다”고 밝혔습니다.
#2. 2016년 6월 영국에서 치러진 브렉시트(Brexit·영국 유럽연합 탈퇴) 국민 투표를 앞두고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는 잔류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투표일 직전 7개 여론조사를 종합한 결과 6개 기관에서 잔류 응답이 탈퇴보다 많았습니다.
브렉시트 찬성 진영에서도 “질 것 같다”는 비관론이 나왔습니다. 파운드화 가치가 연중 최고치로 뛰는 등 영국의 EU 잔류 쪽으로 분위기가 쏠렸습니다. 그러나 국민 투표 결과는 탈퇴 51.9%, 잔류 48.1%였습니다. 오차범위를 고려하더라도 여론조사와 사뭇 다른 결과로 브렉시트가 결정된 것입니다.
1년 전인 2015년 5월 치러진 영국 총선 때도 주요 여론조사 업체 3곳은 보수당과 노동당 득표율이 33∼35%로 거의 동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보수당 36.9%, 노동당 30.4%로 큰 격차를 보였죠. 영국 내에서 여론조사 신뢰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 여론조사가 결정하는 ‘편리한 정치’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론조사 신뢰도가 높지 않은 것은 전 세계 공통 현상입니다. 2018년 미국에서 여론조사에 대한 신뢰도를 물었을 때 믿지 못한다는 답변이 52%로, 믿는다(12%)는 답변을 크게 앞섰습니다. 2021년 한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4%가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론조사는 정확성과 신뢰도의 한계가 있기에 주로 참고자료로 활용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여론조사를 단일화나 공천 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K정치는 유독 여론조사에 목을 맵니다. 정치권에서도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당내 공천 때 여론조사를 만능열쇠로 활용하면서 결국 여론조사가 답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지난해 대선 당내 후보 선출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여론조사를 대폭 활용했습니다. 1차 경선에서 여론조사 80%로 8명을 압축한 뒤 2차 경선에서 70%를 적용했습니다. 마지막 3차 경선에서는 여론조사와 선거인단 투표를 절반씩 반영해 최종 후보를 선출했죠. 민주당 역시 여론조사와 당원조사를 절반 비율로 합산해 최종 후보 6명을 뽑았습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정당이 양질의 당원 중심으로 성장하지 못하다 보니 온전히 당원 뜻으로만 후보를 결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정당 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대체 수단으로 여론조사를 많이 활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는 “요즘 한국 정치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권력을 잡아서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 쟁취 자체가 목적인 것”이라며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당선될 사람을 뽑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여론조사가 남발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여론조사 대부분이 ‘단순 지지율 조사’
선거철이 아니어도 대통령의 직무평가나 정당 지지도 조사는 거의 날마다 이뤄지고 있습니다. 단순 지지율을 비교하는 경마식 중계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에 조사 기관마다 결과 차이가 커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유권자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미국 주요 언론은 선거 때가 아니면 여론조사를 기획하거나 보도하지 않는 편입니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이뤄지는 여론조사 보도 역시 단순 지지율 조사를 넘어 심층분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달 25일부터 31일까지 실시된 CNN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에게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직무 수행지지 여부와 함께 다양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정책이 미국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는지, 바이든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바이든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돌본다고 생각하는지,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둔 것이 자랑스러운지, 그가 효과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체력과 예리함을 갖췄는지를 물어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종합 평가를 시도했습니다.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11일 공개한 영국 리시 수낵 총리 관련 정례 여론조사를 보면 소득 구간, 주택 임차 기간, 소득 증가 여부, 미래 기대소득에 따른 정부 선호도를 조사했습니다.
또 보수당과 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묻기 위해 교육, 치안 국방 등 각종 정책 분야에서 1~10점 척도로 정당 정책에 동의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영국 유권자들은 트랜스젠더 권리 및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해 보수당에 공감했고, 공공 서비스 지출에서는 노동당에 공감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유고브는 100만명 이상의 영국 성인으로 구성된 패널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실시하면서 심층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층적으로 기획된 여론조사는 정당과 인물의 정책적 차이를 여러 각도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단순 지지율 비교보다 정치권에 정책적, 정무적 시사점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선거 과정에서 정당별 공약을 검증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지 논의해야 한다”며 “여론조사를 후보 지지율 위주로만 하면서 국민에게 필요한 정책이나 앞으로 정치권이 개선할 점에 대한 논의가 실종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여론조사가 지지율 중심의 단순 조사로 흐르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다양한 분석을 내놨습니다. 홍형식 소장은 “우리나라는 정책 정당의 역사가 짧고, 정책보다는 이념 정당으로 기능하고 있다”며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다 보니 당선 가능성이 가장 중요하고, 정책적 차이를 조사하는 게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분석했습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가뜩이나 여론조사 응답률이 낮은 상황에서 문항이 길어질수록 응답자 확보가 어렵다”며 “이럴 경우 여론조사 비용이 늘어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 비용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여론조사 보도가 민주주의 수준을 좌우한다
언론의 여론조사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단순 지지율 비교는 온라인 시장에서 소위 클릭수가 보장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기사 제목부터 지지율 수치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보도는 실제 정치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여론조사 수치가 높게 나오는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정치권 인사들은 그의 당선 가능성을 보고 줄을 섭니다. 당선이 유력한 선거 캠프에 자금과 조직이 몰리게 됩니다. 언론도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를 집중 보도합니다.
반면 판세 역전을 노리는 후보는 언론에서 소외되고 유권자에게 잊히게 됩니다. 선거 여론조사는 유권자들이 어떤 후보를 왜 선택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유권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여론조사가 선거를 승패 중심으로 단순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 해외 언론에서는 기사 제목에 여론조사 수치를 그대로 적는 경우가 드뭅니다. 일본은 NHK 등이 간간이 자체 여론조사를 실시하지만 조사 수치만을 그대로 보도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여론조사 결과를 기사 제목으로 뽑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의 여론 조사, 실태와 한계 그리고 미래’ 책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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