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왜 시간이 빨리 흐를까[살며 생각하며]
현실 더좋게 만드는 건 내 책임
“삶이 퍽퍽해” 투덜대 부끄러워
이타심·유머, 내 삶에 적용해야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내가 맨날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길밖에 없어…정신 차리자
삶이 밍밍하고 퍽퍽하다. 매일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다 보면 어느새 달력을 한 장 또 넘긴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더디던 시간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제는 쏜살같다. 인생의 자동차는 20대 때는 시속 20㎞로 느리지만, 40대 때는 40㎞로 달리다가 80대가 되면 80㎞ 속도로 달린다던 농담이 실감 난다. 벌써 가을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곧 환갑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뭐 새롭고 신나고 가슴을 뜨겁게 해줄 게 없을까?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나이 들수록 기억해야 할 정보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릴 땐 모든 것이 새로워 기억해야 할 게 너무 많지만, 나이가 들며 익숙한 생활을 거듭하게 되면 새롭게 기억해야 할 것이 줄어들게 된다. 기억할 게 적어지고 새로운 게 별로 없게 되면 시간은 빨리 흐른다. 처음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만, 익숙한 길은 가깝게 느껴지듯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정보 전달과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전달과 처리의 속도가 빨라서 바깥세상이 느려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그 속도가 느려져서 상대적으로 세상이 빠르게 느껴진다. 뇌의 각성 상태가 낮아져서 세상이 빨라 보이는 것이다.
다시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데, 창밖에 비가 내린다. 흔히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배우’라고들 하는 터프 가이 험프리 보가트처럼 중절모를 쓰고 트렌치코트의 깃을 올리고 빗속을 걷는 상상을 한다. 그럼 좀 낭만적일까? 그런데 내 옷장에는 그런 소품들이 없다. 나도 예전에는 참 낭만적인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나는 현실이나 나의 삶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 살다 보니 현실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 재미없고 답답한 인생을 어떻게 하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퍽퍽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먼저, 잠수타기다. 현실에서 떠나 잠을 자거나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 냉장고에 들어가 정지되는 것. 주로 청소년들이 많이 하는 이 원초적인 방법은 나에겐 마땅치 않다. 사회적 기능의 저하가 동반되니까.
다음은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자아를 돕기 위한 퇴행’이 있지? 나이와 이성을 잠시 내려놓고 어린아이로 퇴행해서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 유치하게 놀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 어린아이처럼 솜사탕을 사 먹거나 풀밭을 뒹구는 것. 고교 동창을 만나 그 시절처럼 웃고 떠드는 것.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그다음은 낭만이 있지. 그저 그런 현실을 잠시 외면하고 내가 매력적인 사람인 양 자기기만을 하는 것. 여행을 떠나 내가 아닌 더 현명하고 멋진 사람으로 잠시 사는 것. 희망과 열정이 있던 시기로 잠시 돌아가는 것. 아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일몰을 바라보는 것…. 낭만이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대상을 감상적으로 느끼며 좋은 쪽으로 이상화하는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상을 현실보다 더 멋지고 매력적인 상태로 인식하는 것도 낭만이지. 물론 낭만과 현실 간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하겠지만.
또 그다음은 혼자만의 시간이다. 현실에서 한걸음 떨어져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되돌아보는 시간. 현재 나의 생활과 역할이 나의 삶의 목표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시간. 만일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하면 변화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 내게는 부족했었구나?
생각해 본다. 난 참 열심히 살았는데, 양보하며 도움이 되려 노력했는데. 억울하다. 그리고 외롭다. 정말?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맹세할 수 있어? 아니 그게…. 뭐, 그렇다는 거지…. 삶의 즐거움과 의미는 혼자 사색하는 시간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조화를 이룰 때 찾을 수 있는 거잖아?
아내와 단둘이 속마음을 이야기한 지 얼마나 되었지? 아이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한 것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도 자신만의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만, 가장 나이 많고 현명하다 자처하는 나는? 내가 참 무심했구나? 아내가 나보다 더 외로웠겠구나? 일 때문에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은 대화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을 하기 싫어서였던 것 같다.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힘들어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삶이 재미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현실을 떠날 수 없다면 현실을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 수밖에.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고 나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결국 내 책임인걸. 허상이나 환상에 집착하지 말고, 잘못과 실수에서 배워서 더 잘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지 말고, 희망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기. 아, 참 힘든 일이다.
가만히 보니 내 징징거림은 내가 진료실에서 날마다 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좋은 부모·친구·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들. 따뜻함, 일관성, 대상에 대한 민감성, 오해와 갈등이 생겼을 때 먼저 관계를 개선하는 관계 관리 능력. 그리고 성숙한 어른의 특성들. 이타심, 자제력, 융통성, 승화, 유머. 이 조건과 특성들을 내 삶에 적용해야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삶의 즐거움과 의미를 더 정확하게 보고 느낄 수 있잖아? 내가 맨날 하는 이야기잖아? 그 길밖에 없잖아? 창기야, 정신 차리자. 이제 제발 좀 어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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