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후보 이균용의 ‘가해자 빙의’ [김민아의 훅hook]

김민아 기자 2023. 9. 1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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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문자 그대로 ‘기념비적’ 판결을 내놓는다. 성희롱을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를 복직시키라는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면서다.

“법원이 성폭력 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약자·소수자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대법원 역할에 걸맞은 판결이자, 전 세계적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물결에 조응하는 사법부의 선언이었다. 이 판례는 이후 1·2심 법원의 판결에 인용되며 성폭력 사건 판단의 유의미한 잣대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법을 2018년 이전으로 되돌릴 만한 인물이 대법원장으로 지명됐다. 오는 19~20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는 이균용 후보자다. 이 후보자는 2020년 9월~2021년 2월 서울고법의 성폭력 전담재판부인 형사8부 재판장을 지냈다.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례가 정립된 이후다.

더불어민주당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경향신문·한국일보·한겨레·CBS노컷뉴스 등 보도를 종합하면, 이 후보자는 이 기간 중 성폭력 범죄 85건을 처리했다. 비공개된 1건을 제외한 84건 중 77건에서 유죄를 선고했다.

유죄 77건 가운데 형량을 깎아준 판결은 32건(41.6%)에 달했다. 감형한 32건 중 피해자와의 합의 등 1심과 다른 ‘사정변경’이 있는 사건은 23건이었다. 나머지 9건은 피해자가 엄벌을 원했음에도 형량을 줄여줬다. 도대체 왜 깎아준 걸까. 사례를 보자.

① 징역 12년 만기출소 후 8일 만에, 13세 여학생을 추행하고 상해를 입힌 피고인 = 1심 선고 형량 징역 18년을 징역 15년으로 깎아줬다. 이 후보자는 “피해자가 입은 상해는 중하지 않다. 피고인은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받았고, 오랜 교도소 생활로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② 12세 어린이를 세 차례 성폭행한 피고인 = 징역 10년을 7년으로 깎아줬다. “개선·교화 여지가 남아있는 2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라는 게 이유다.

③ 가정폭력을 일삼다 아내의 배를 발로 밟아 숨지게 한 피고인 = 징역 10년을 7년으로 깎아줬다. 살인 고의가 없었다며 상해치사죄만 적용했다. 이 후보자는 “남편이 아내의 건강이 안 좋다는 걸 모르고 평소처럼 폭력을 썼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④ 헤어진 여자친구가 성관계를 거부하자 폭행·강간한 피고인 =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선고한 징역 7년을 5년으로 깎아줬다. “피해자는 당시 만 18살로 성년에 거의 근접”했으며 “피고인은 당시 21살의 비교적 젊은 청년으로 교화·개선 여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10대 피해자는 성인처럼, 20대 가해자는 미성숙한 소년처럼 간주했다.

⑤ 같은 버스에 탄 여성을 아파트까지 쫓아가 추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피고인 = 실형(징역 1년3개월) 대신 집행유예 판결을 했다. “술에 취해 범행”했고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도 성실히 회사 생활을 하며 대학에 입학하는 등 독립자존의 자세가 있다”는 점을 감형 사유로 밝혔다. 가해자가 독립자존적이든 아니든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는 무관하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의 모습. 권도현 기자

‘피해자와의 합의(처벌불원)’를 감형 사유로 삼은 판결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합의가 이뤄졌다 해도, 일방의 강압에 의한 것 아닌지 따져볼 책무가 재판부에 있다.

의붓아버지가 자고 있던 17살 딸의 방에 들어가 유사성행위를 한 사건에서, 이 후보자는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감형 이유로 ‘피해자와 합의’를 들었다. 생계를 책임지는 계부와, 당장 갈곳 없는 미성년 딸을 동등한 권리 주체로 볼 수 있나. 이들 사이 합의를 평등하고 실효적인 계약으로 간주할 수 있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온 나라가 공분하던 2020년 말이다. 이 후보자는 성범죄 현장을 담은 영상물을 찍은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3명 중 1명의 형량을 깎아주고 2명은 집행유예로 감경했다. 사유는 “피해자와 합의했고 깊이 반성하고 있어서”였다. 범죄 행위를 “친구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충동적·직관적 행동”으로 치부한 건 더 심각한 문제다.

또래 피해자의 성기에 신체 일부를 넣는 행위를 하고, 이를 촬영해 유포한 14세 남학생 사건을 보자. 1심은 장기 2년에 단기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후보자는 집행유예를 선사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소년으로서 ‘잘못된 성적 충동’으로 말미암아 범행을 저지르게 됐고” “피해자들과 원만하게 합의”했다고 했다. 남성의 성적 충동을 자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21세기 상식에 속한다.

2020년 5월 서울 강남역 9번 출구 앞에서 개최한 ‘강남역에서 부터 n번방 까지 성폭력 규탄 이어말하기’에서 참가자들이 한국사회에 넘쳐나는 성폭력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후보자는 재산과 관련해서도 갖가지 의혹을 받고 있다. 공직자 재산신고 시 10억원 상당의 비상장주식 보유 현황을 누락한 사실이 드러났다. “법령 개정 사실을 몰랐다”지만, 고의 누락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 재산도 전혀 신고하지 않다가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되고 나서야 일부만 공개했다. 농지법 위반 의혹, 아들의 김앤장 인턴과 관련한 ‘아빠 찬스’ 의혹도 있다.

이런 대법원장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과반 야당이 부결시킬 가능성을 상정해 윤석열 대통령이 ‘버리는 카드’로 이 후보자를 지명했다는 설, 낙마에 대비한 ‘플랜B’가 있다는 설까지 돌겠는가. 이 후보자가 플랜A인지 플랜B인지는 관심없다. 2023년 한국사회에 걸맞지 않은 젠더 인식, 고위 법관이라고 믿기 힘든 공직윤리를 보여온 이 후보자는 대법원장 자격이 없다.

일각에서는 이 후보자를 옹호하며 대법원장도 대법관 14명 중 1명일 뿐이라고 한다. 어림없는 소리다.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이자 법원의 인사·조직·운영 등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수장이다. 그의 한 마디, 한 걸음이 사법부 전체에 던지는 메시지는 심대하다.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상세하게 쓰는 것으로 잘 알려진 판사 박주영은 저서 <어떤 양형 이유>에서 말했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이 말을 이 후보자, 그리고 ‘친구의 친구’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윤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다.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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