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도시’를 방문한 유대인 소년 멘델스존

2023. 9. 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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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지방의 주요 도시 라이프찌히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비텐베르크는 인구 약 4만 7000명 정도의 소도시이다. 이 작은 도시의 현재 공식명칭은 루터슈타트-비텐베르크(Lutherstadt-Wittenberg), 즉 ‘루터의 도시-비텐베르크’이다. 비텐베르크 시내 안에 들어서면 이곳이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의 진원지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비텐베르크 시청사 앞 광장 마르크트플라츠.

비텐베르크의 심장부는 시청사 앞 광장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 시장광장)이다. 이 광장 중심에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시청사 건물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고 광장 한쪽에는 그의 동료 종교개혁가 멜란히톤의 동상도 보인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로 두 개의 길이 연결되어 있다. 즉, 동쪽으로는 루터하우스가 있는 길 콜레기엔슈트라세(Collegienstrasse), 서쪽으로는 비텐베르크 성城으로 연결되는 길 슐로스슈트라세(Schlossstrasse)가 도심의 주축을 이룬다.

광장 서쪽 멀리 슐로스슈트라세가 끝나는 곳에는 루터가 이따금씩 설교했던 비텐베르크 성城 부속 교회의 원통형 첨탑이 시선을 끈다. 원통형 첨탑 상부에는 큼지막한 글씨 <Eine feste Burg ist unser Gott>가 마치 자신감에 찬 홍보문구처럼 둘려있는데 다름 아닌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이 제목의 찬송가는 프로테스탄트를 상징하는 곡으로 우리나라 개신교 찬송가의 585장이다. 가사는 루터가 1527~1529년에 쓴 것이고, 곡도 그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루터를 보호했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트리히 현공의 궁정이었던 비텐베르크 성城은 19세기에 병영으로 사용되면서 성의 원래 특성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이 성에 부속된 교회는 루터가 살던 시대의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린히톤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비텐베르크 성 부속 교회. 원통첨탑에 독일어 문구 ‘내 주는 강한 성’이 보인다.

로마교황청의 면죄부 판매행위를 비판적으로 봐왔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바로 이 교회의 북쪽 출입문에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교회의 폐단을 비판하고 항의하는 ‘대자보’였다. 루터의 행동은 당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가올 종교개혁이라는 격동의 시대의 서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게시한지 13년이 지난 1530년, 황제 카를 5세는 남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여 각 교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하는 문건을 제출하라고 했다. 이에 루터를 대신하여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에 가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담은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조’를 제출했다. 이때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힘차게 불렀던 찬송가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던 목재문 자리에는 현재 <95개조 논제>로 장식된 청동문이 역사적인 순간을 증언하고 있다. 이 청동문 상부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오른쪽에는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조를 두 손에 쥐고 있다.

<95개조 논제>로 장식된 청동문.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멘델스존(1809-1847)이 처음 방문한 것은 11살 때였다. 당시 그는 베를린에서 ?터(C. F. Zelter)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있었는데 괴테와 친분이 두터웠던 ?터는 어린 제자 멘델스존을 데리고 괴테가 살던 바이마르로 향하던 중에 비텐베르크에 하루 들렀던 것이다. 멘델스존은 이 교회에 있는 유서 깊은 오르간을 연주해 보고는 매우 기뻐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1830년 베를린에서 6월 25일로 예정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조 300주년기념 행사용으로 멘델스존은 ‘종교개혁’이란 제목의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1월에 일찌감치 작곡을 끝내고 몇 달 동안 여행 갈 계획이었으나 건강 문제로 작곡에 손을 놓고 있다가 비로소 5월에야 끝냈다. 하지만 예정보다 늦게 완성되는 바람에 이 곡은 기념행사에서 연주되지 못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반유대인 정서 때문에 그의 곡이 배제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시청사 앞 마르틴 루터의 동상.

멘델스존은 1809년 함부르크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유대 전통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에게 할례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멘델스존이 2살 때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멘델스존은 그곳에서 7세 때 프로테스탄트 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게다가 멘델스존은 28세 때 프로테스탄트 교회 목사의 딸과 결혼했다.  

<교향곡 5번 ‘종교개혁’>은 이처럼 유대인이지만 프로테스탄트였던 그가 21세에 쓴 작품이다. 이 교향곡은 1악장 ‘드레스덴 아멘’이라고 하는 ‘세 번 아멘’ 선율로 조용히 시작하여 마지막 4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연주하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로 웅장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이 교향곡을 쓸 때 프로테스탄트의 성지(聖地)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던 시간을 틀림없이 떠올려보았으리라. 비록 짧은 일정이었긴 하지만.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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