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던 출생통보제 내년에야 시행, 아이들 희생돼야 정책 바뀌다니…”[M 인터뷰]
15년간 20여회 발의 시도 만에
의료기관서 자동신고 가능해져
보호출산제는 최후의 보루 역할
위기임산부 두터운 지원이 우선
아이 놀라게 하는 SNS 영상들
치욕적인 감정 주는 ‘정서 학대’
입양은 드라마가 아닌 실제 삶
양부모 칭찬 아닌 축하받을 일
가난한 아이도, 부유한 아이도 행복하지 않다.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나 아동 삶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늘 꼴찌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방임과 폭력 등 학대에 노출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잦고, 일반 가정 아이들은 공부 탓에 과도한 경쟁에 내몰린다. 얼마 전에는 출생 기록도 없이 버려지거나 숨진 아기들의 존재가 알려져 큰 충격을 안겼다. 아이들이 병들거나 안전하지 않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저출산 문제와도 무관치 않다. 아동 관련 현안이 끊이지 않았던 최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에서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을 만났다. 정 원장은 설립한 지 4년 된 아동권리보장원의 2대 원장으로 올 4월 취임했다. 보장원은 정부의 아동 정책 수립과 아동 관련 사업 수행을 위해 출범한 기관이다. 정 원장에게 출생 미신고 아동, 자립준비청년, 아동학대 등 사회적 논란이 된 아동 관련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들어봤다.
―올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지난 8년간 출생 미신고 아동 2123명 중 249명은 이미 숨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뒤늦게 출생통보제가 지난 6월 국회를 통과했고 내년 7월부터 시행된다. 이 같은 비극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태어난 아이의 출생신고를 못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생활고, 사회적 차별, 가족 간 갈등 등이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출생등록 권리를 부모 등 개인에게 맡겨놓았다는 데 있다. 공적 책임이 부족했던 제도적 허점이 주된 요인일 수 있다. 부모가 한 달 내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도 과태료 5만 원을 내는 게 전부다. 선진국 중에서 개인에게 출생신고 부담을 지우는 곳은 없다.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가 동시에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동복지 전문가들은 예전부터 출생통보제 도입을 주장해왔다. 15년 동안 국회에서 20번가량 발의됐는데 법제화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져야 제도화되는 경우가 많다. ‘아동정책은 아동의 피를 먹고 만들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 출산이 가능한 ‘보호출산제’ 입법이 진행 중이다. 산모와 아기 둘 다 지킬 수 있는 전제조건은.
“위기임산부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다. 아이는 원가정에서 양육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위기임산부가 출산과 양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지고 상담, 출산과 양육 전 과정을 두텁게 지원해줘야 한다. 우선 위기임산부에게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과 준비되지 않은 출산은 임산부를 고립시킬 가능성이 높다. ‘129’ 등 위기임산부를 돕는 전화도 5곳 개설돼 있다.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보호출산제는 최후의 보루다. 지원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줘 산모가 아기를 직접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다. 보호출산제는 어떤 이유로 양육을 포기할 때 선택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임신 갈등 상담소’가 많이 설치돼 있다. 임신중지, 입양, 출산 등 여러 선택지에 대한 상담을 폭넓게 해준다. 국내에서 병원 밖에서 아이를 낳는 위기임산부는 연간 100∼200명으로 추산된다. 지원 가능한 규모라고 본다.”
―아동학대 사건도 잇따르는데.
“재학대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아동학대를 한 사람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보호자다. 처벌이 능사가 아닌 이유다. 아이들에겐 부모 외에는 대안이 없다. 상식적이지 않은 부모라고 해도 아이들은 같이 살기를 원한다. 학대 부모와 아이를 무조건 분리시키면 문제가 생긴다. 학대받던 아이가 원가정으로 돌아가려면 제대로 준비가 돼야 한다. 아이가 원가정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양한 절차가 필요하다. 교육, 상담, 치료, 가정환경 조사 등이 있다. 사후 관리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셰어런팅’(부모가 온라인에 자녀 사진 공유)이 아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도 많은데.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은 편이다. SNS상에 아동학대 사례가 꽤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아이에게 싫어하는 음식을 먹이거나, 깜짝 놀라게 하거나 ‘몰래카메라’로 놀리는 행위다. 이 역시 정서학대다. 부모들이 별생각 없이 올린 영상이나 사진으로 아이들은 범죄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이에겐 치욕스러운 감정을 줄 수 있다. 최근 급변한 디지털 환경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아동의 영상 출연 관련 규정은 대부분 권고다. 셰어런팅의 주체는 부모다. 아이와 계약을 맺고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촬영이 아니다. 촬영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아동권리 침해요소를 보호자나 제작자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보장원은 지난 2021년 아동과 청소년 영상 2000개를 모니터링해서 아동권리 침해가 우려되는 지점을 확인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가이드라인도 개발했다.”
―‘홀로서기’를 하던 자립준비청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자립준비청년들은 국가와 사회의 자녀들이다. 훌륭하게 독립한 아이들도 있지만 고립되거나 은둔하는 아이도 많다. 전체 10~40%가량은 연락이 끊긴다. 다행스럽게도 자립준비청년 본인이 원할 경우 보호종료 기간이 만 18세에서 만 24세까지 연장됐다. “언제까지 지원해야 하느냐”란 얘기도 나온다. 일반 가정에서 자란 대다수 아이는 첫 직장을 30세 전후로 얻는다. 이들은 자립할 때까지 부모의 도움과 지원을 받는다. 자립준비청년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돼야 한다. 최근 심리 정서 지원을 중점적으로 보강하고 있다. 심리 정서적 문제는 보호 시부터 관리돼야 한다. 보장원은 자립준비청년들이 언제든 연락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다. ‘바람개비서포터즈’처럼 이미 자립한 선배들과 만날 수 있는 멘토링도 확대하고 있다. 바람개비서포터즈는 지난 2010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자립청년들의 자조 모임이다. 자립준비청년의 사회적 지지체계를 다지는 게 목표다. 전국에 2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자립준비청년 상담센터’는 전화(1855-2455)와 카톡으로 운영된다. 자립한 선배 2명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화나 카톡으로 직접 상담해 준다. 홀로서기 상황을 겪지 않은 전문가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 사회에 안착한 청년들이 선배로서 심리적으로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준다. 자립준비청년의 자립은 정책적 지원으로만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멘토링, 디딤씨앗통장(취약계층 아동의 목돈 마련을 지원) 후원 등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입양에 대한 국가 책임도 강화됐는데.
“한 아이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입양의 준비 과정은 탄탄하고 촘촘해야 한다. 입양은 ‘해피엔딩’의 드라마가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실제의 삶이다. 입양은 양부모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축하받아야 할 일이다. 남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를 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출산과 입양을 구분 짓는 시각이 강하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가가 직접 입양을 주도하는 내용이 담긴 ‘국내입양에 관한 특별법’과 ‘국제입양에 관한 법’이 2025년 7월 시행된다. 앞으로는 지방자치단체가 입양대상 아동의 결정·보호를 이행한다.”
기관 8곳 합친 공기관… 취임 뒤 석달간 전직원 1대1 면담
■ ‘아동복지 전문가’ 정 원장
복지부와 정책 수립 가교 역할
업무 효율화·인지도 향상 목표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은 국내 대표적인 아동복지 전문가다. 지난 2008년부터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공동집필한 책을 25권가량 내놓았다. 지난 2005년과 2008년에 각각 나온 ‘청소년 복지론’과 ‘아동복지론’은 사회복지학과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정 원장은 “아동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아동 관련 지식과 정보를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확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일회성으로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만큼 아동복지 관련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지난 4월부터는 행정가로서 아동정책을 구현하고 있다. 사업 측면에서는 증거에 기반한 아동복지정책을 운영해 공공성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목표다. 보건복지부와 함께 아동정책을 만들어 내는 가교 역할도 해야 한다. 보장원의 사업 범위는 넓다. 중앙입양원·아동자립지원단·드림스타트사업지원단·실종아동전문기관·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지역아동센터중앙지원단·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디딤씨앗지원사업단 등 대상 아동과 사업에 따라 나뉘어 있던 기관 8곳을 통합해 2019년 문을 연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내년 시행될 ‘출생통보제’와 관련해 입양 사실 확인, 피해 아동에 대한 법률 지원 등 대응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다. 자립준비청년의 사회 정착, 아동학대 예방, 공적 입양 체계 구축도 힘을 쏟는 사업이다.
보장원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도 당면 과제다. 기관 8곳을 통합해 현안은 많지만 신생 공공기관인 만큼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져서다. 기관 8곳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화학적 결합을 이뤄 공통의 조직문화를 일구는 것도 숙제다. 정 원장이 취임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체 직원 168명을 1대1로 면담한 것이다. 시간은 약 3개월 걸렸다. 직원들의 주된 바람은 공공자원이 낭비되지 않도록 업무를 효율화하고, 인지도를 높여 달라는 것이었다. 정 원장에겐 3년 임기 내내 이행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다.
권도경 기자 kw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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