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흉기소지범’ 박 아무개씨를 돕는 사람들
단 3시간 만이었다. 탄원서 1015장이 모였다. “○○○ 판사님, △△△(박 아무개)님의 구속영장 기각을 간곡히 탄원드립니다.” A4 한 장을 빼곡히 채운 탄원의 변에 1005명이 연대 서명을 했다. 10명은 자필이나 컴퓨터로 탄원서를 직접 작성했다. 입말로, 전화 통화로, SNS를 통해 퍼져나간 박씨의 구속영장 실질심사 소식에 그를 좋아하거나 친하거나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손을 보탰다.
구속영장 청구서에 적힌 박씨의 죄명은 ‘특수협박’. 8월17일 밤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일대에서 ‘칼을 들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소리를 지른 60대 남성 A씨’가 바로 그였다. 그날 오전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종일 방송과 인터넷에 이른바 ‘묻지마 범죄’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도배되던 날이었다. 박씨의 모습을 담은 CCTV 영상도 그 사례 중 하나로 돌아다녔다. 영상 안에서 박씨는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휘두르거나 누군가를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들고 편의점 앞 등에서 두리번대다가 30분쯤 지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경찰은 ‘이상한 사람이 칼을 들고 소리를 지른다’는 신고를 받고 CCTV 영상을 추적해 박씨의 집에서 그를 체포했다. 뉴스 기사 속에서 박씨는 “시끄러워서 다 죽이려고” “20㎝ 회칼 들고 대학로 활보한” “평소에도 새벽에 괴성을 질러 이웃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든” “흉기난동범”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흉악범을 위해 왜 101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탄원서를 써줬을까? 탄원서 내용과 주변 지인들 설명에 따르면, 박씨는 중증 지적장애 발달장애인으로, 홈리스 출신 기초수급자이자 형제복지원 피해자이다. 동시에 박씨는 2002년부터 반빈곤·노숙인 인권단체와 관계를 맺어온 시민이자 활동가이다. 단체들이 마련한 공동체 공간 아랫마을에서 거의 매일같이 밥을 먹고 한글 공부도 하는 식구이자 학생이었다. 종종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서울역 등으로 ‘아웃리치’ 상담과 봉사를 나가기도 한 동료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아프고 가난했지만 고립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받은 여러 신체 학대의 후유증으로 팔이며 다리가 성하지 않았고, 장애등급제 폐지 이전 2급 지적장애(지능지수 35~49, 정신연령 3~7세) 판정을 받았다. 출생등록조차 안 된 채 수십 년을 살다가 1983년에야 급조한 이름과 생년월일로 주민등록을 마쳤다. 어린 시절 이런저런 보호·격리 시설에서 굶주림과 폭행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서울 상계동, 고양 일산, 파주 문산, 밀양, 경주, 충주 등지에서 연탄을 배달하고, 경운기를 운전하고, 청과물 시장 바닥을 청소하고, 양계장에 톱밥과 짚을 깔아주고, 수박·참외·딸기 농사를 짓고, 골목길의 파지를 수집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사람을 좋아하는 가난뱅이”
이후 집 없이 떠돌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시기 서울역에서 지금의 아랫마을 식구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욕을 잘하고 간혹 소리를 지르고 성질이 다소 고약하기도 하지만” “몸이 너무 약하고 잘 넘어지고 울기도 잘 하는” 박씨를 아랫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아끼고 돌봐주었다. 그들은 헤어진 가족이 어딘가 살고 있을 거라며 서울과 지방 각지를 헤맬 때 같이 찾으러 다녀주기도 하고, 형제복지원 피해 증언을 듣고는 공식 피해자 결정을 이끌어내주었다. 노년에 편안히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돕고, 그 노력 끝에 지난해 9월 공공임대주택에 입주시킨 뒤에는 종종 들러 생활용품을 채워넣고 함께 청소를 했다. 박씨는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과 미소 하나로 야학 교사 몇 명을 낚았는지 모를(그는 야학 교사 모집 포스터 모델이었다) 홈리스야학의 마스코트였고,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자 발달장애 홈리스로 꿋꿋하게 살아남으려는, 사람을 좋아하는 가난뱅이(김최건희 활동가)”였으며, “재밌고 엉뚱하고 애교가 많고,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짠한 마음이 드는 ‘손 많이 가는’ 사람(이동현 활동가)”이었다.
8월30일에도 박씨가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냉장고 음식도 썩고 집이 엉망이 될 텐데” 걱정이 된 림보, 반짝이, 꺽쇠, 강아지(별명) 등 아랫마을 학생들이 그의 집에 가서 집 안을 쓸고 닦았다. 3시간여 청소를 마친 뒤 이들은 뻐꾸기시계가 걸린 부엌 겸 거실에 모여 앉았다. 뻐꾸기 시계는 일전에 아랫마을 친구들이 난생처음 집이라는 데에서 살게 된 그에게 준 집들이 선물이다. 같은 홈리스 처지를 겪어본 동료이고 친구이자 오랫동안 그를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이들은 말했다. “할아버지는 뉴스에 나온 것처럼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종종 소리는 좀 지르지만 한 번도 누구를 때리거나 아프게 한 적 없어요.” 2002년 서울 회현역 노숙 시절 박씨를 통해 홈리스행동과 처음 연을 맺고 지금은 아랫마을 야학 회장을 맡고 있는 림보는 “살인사건이 많이 나는 요즘 같은 때 이런 일이 벌어져서 너무 안타깝다. 할아버지가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 누구를 해칠 사람은 아닌데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이웃들을 불안하게 만든 박씨의 ‘괴성’에 대해서도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를 대신해 변호했다. “허공에 대고 지르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엄마도 부르고 동생도 부르더라. 한글을 잘 모르는 할아버지가 특정 지명을 메모지에 써달라며 두서없이 그곳을 찾아가겠다고 한 적도 많았다. 왜 가느냐고 물으면 ‘거기가 엄마 고향이다’ ‘동생이 산다’ 그런다. 그때부터 할아버지가 소리 지를 때마다 뭔가 그리움의 표현이겠구나 생각했다(대장(별명) 활동가).”
함께 목욕탕에 가서 옷을 벗으면 박씨 몸에는 지난 세월 받은 폭력의 상처들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13년 전 박씨 인터뷰가 실린 홈리스 글쓰기 모임 문집 〈늦봄에〉에 그 아픈 기억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만날 술 먹고 노는 거야. 애기가 울고 그러면 집어던지는 거야. 그래 가지고 팔이 부러진 거야. 엄마가 업고 병원에 가서 붙였는데 이렇게 (구부러지게) 된 거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냐고 묻자) 고아원에 오기복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죽었어. (왜요?) 고아원에서 쌀하고 콩하고 들어오면 강냉이로 바꿔치기해서 강냉이죽만 끓여줬어. 너무 배고파서 전방을 뒤지다가 같이 두드려 맞다가 죽었어. 쇠로 되어 가지고 야구방망이 같은 걸로.”
깨지고 부서진 몸은 최근 몇 년간 급속히 더 쇠약해졌다. 걷다가 다리 힘이 풀려 걸핏하면 혼자 넘어지기 일쑤였다. 고시원 4층 계단에서 넘어져 팔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2년 전에는 뇌경색을 진단받았다. 섬망 증상이 나타나고 소리 지르는 횟수도 늘었다. 올해 3월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다가 퇴원했다. 한층 더 걸음걸이가 불편해진 박씨는 기초수급비로 보행 보조기를 사서 집 안에 두었다.
“섞여 살고 싶진 않다”는 사람들에게
박씨의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지르는 고함과 괴성을 타인을 향한 위협과 협박이 아닌, 지난 삶의 상처와 현재의 고통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소지하고 있었다는 일명 ‘회칼’에 대해서도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박씨를 데리고 종종 바다낚시를 다니던 한 고시원 거주 지인이 짐을 놔둘 데가 없다며 그의 임대주택에 낚시 가방이며 생선 손질용 칼이며 장비들을 갖다뒀다는 것이다. 경찰조사 때 조력자로 동석한 이동현 활동가는 “조폭영화에나 나올 법한, 생선포를 뜨는 그런 얇고 긴 회칼이 아니라 끝이 뭉뚝한 생선 내장 손질용 칼인데 경찰은 조사 내내 사시미 칼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더라”고 말했다.
박씨를 돕는 사람들은 탄원서에서 주장했다. “박△△님은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압박,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자극 등을 받을 때면 사건의 인과성을 합리적으로 판별하지 못해 큰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하고 과잉행동을 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잉행동이 타인을 향한 실제적인 물리적 위해로 이어지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흉기를 소지한 채 소리를 질러 동료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인과관계 추론에 어려움을 겪는 중증 지적장애 특성에 따른 우발적이고 단발적인 과잉행동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됩니다. 현재 여러 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계획된 범행 및 물리적 위해 시도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과 맥락이 전해지기 전 박씨는 이미 언론과 대중 사이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가해자, 흉기난동자, 흉악범 등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최근 시민 다중을 위협하는 강력범죄가 잇따르는 가운데 박씨 사건은 경찰의 강력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경찰은 처음 이 사건에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흉기 휴대)을 적용했다가 “시민들이 느꼈을 공포심 등을 고려해” 죄질이 더 무거운 특수협박죄로 변경했다. 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정황 등을 따져 물으며 살인 예비 혐의를 검토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탄원서를 제출한 이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다만, ‘잘못한 만큼’만 벌을 주자고 말한다. 이동현 활동가는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지는 말아야 한다. 경찰은 자꾸 의도된 범행이었고 일부러 칼을 준비했고 사람 많은 장소를 물색해서 시민들을 위협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며 묻지마 범죄의 일종으로 처벌하고 싶어 했다. 굉장히 부적절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그럴 힘도 없다.” 이씨는 또 박씨에게 해당되는 여러 양형 조건과 정상참작 요소들이 지금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재판에서 배제될까 봐 우려했다.
8월19일 법원은 박씨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들였다.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고 박씨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곧 재판이 열릴 것이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날지 아직 모르지만, 활동가들은 그가 밖에 나오면 꼭 인지치료와 상담, 과잉행동 교정 등의 정신적 치료를 받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 일로 많이 놀랐을 박씨 집 이웃들을 찾아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사정을 설명드리자는 이야기도 오갔다.
활동가들이 퇴근을 해도, 휴가를 가도 박씨가 지역사회 속에서 무탈하게 지낼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니, 사실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박씨의 범행 소식을 전하는 뉴스 기사 아래에는 이런 종류의 댓글들이 달렸다. “복역 기간만큼 정신병원에 강제수용해 치료와 사회 격리 모두를 실현하는 것이 괜찮겠네요. 섣부른 인도주의적 감성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치료 도중 잠적하여 죄 없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까요?”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섭다. 섞여 살고 싶지는 않다’는 이런 마음을 일면 이해하면서도, 아랫마을 활동가들은 원래도 사회에서 밀려난 박 아무개씨 같은 이들을 자꾸 더 밀어내고 배제하고 격리하고만 싶어 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그래도 한번 더 돌려보고 싶다. “살다 보면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취약성에 도달하는 시점이 와요. 거슬린다고 사회와 분리하고 눈앞에서 떨어뜨려놓기만 하다 보면 결국 그 차례는 나에게도 올 수 있지 않을까요?(최현숙 작가·아랫마을 활동가)”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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