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진짜 위기는 무색무취…특정 자산 쏠림과 ‘낙관의 함정’은 경제위기 징조”

전태훤 선임기자 2023. 9. 1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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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영 신한은행 팀장, 한국 4대 경제위기 속성 분석
“알려진 위기는 이미 관리중…가려진 위험 찾아내야”
“좋은 상황 이어질 거란 낙관의 관성에 빠진 순간 위기 닥쳐”
“특정 자산이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위기의 사인”

성장과 침체를 반복하는 경제 흐름을 보면 맑았다가 흐려지고, 비가 오고 개기를 반복하는 날씨와 흡사하다. ‘Rainy day’가 비 오는 날을 말하기도 하지만 글자 그대로의 뜻을 넘어 경제적으로 어렵고 궁핍한 상황을 칭하는 것도 닮아있다.

지구촌을 뒤흔든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2000년 초 불어닥친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시작된 코로나 창궐과 갑자기 찾아온 인플레이션의 역습 같은 ‘소나기’는 세계 경제의 기상 구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겪은 4대 경제위기의 생성과 소멸의 속성을 다룬 신간 ‘위기의 역사’를 쓴 오건영 신한은행 WM사업부 팀장은 “커다란 경제위기엔 좋은 상황이 계속될 거란 ‘낙관의 함정’이 늘 앞서 있었다”며 “위기는 단절을 가져오지만 흐름을 새롭게 바꿔 놓는다”고 했다.

비 온 뒤 땅은 더 굳어졌을까? 우리가 겪었던 위기와 시련은 대한민국 경제를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었을까?

오건영 신한은행 WM사업부 팀장이 커다란 경제위기엔 낙관의 함정에 빠진 공통 징조가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태훤 선임기자

-경제위기엔 어떤 공통점이 있나?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 겪은 4차례 큰 위기엔 공통점이 있다. 지금까지 이어온 (좋은) 환경이 앞으로도 이어질 거란 안일한 방심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 당시엔 10년간 이어졌던 엔화 강세가 계속될 거란 심리가 있었고 1990대 중반 PC 붐이 일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는데, 그런 흐름이 계속될 거란 기대가 컸다. 갑자기 엔화가 약해지고 반도체 경기가 죽으면서 수출이 급감하고 달러 빚에 문제가 생기면서 결국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다.

‘닷컴 버블’의 위기도 인터넷 성장이 무한 반복될 것 같은 기대가 꺾이고 한계에 봉착하면서 닷컴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며 생긴 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부동산 가격 상승세가 계속될 거란 믿음이 깨진 결과다. 30~40년간 올랐던 미국 부동산 가격이 2006년부터 빠지기 시작했고, 그 파고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무너져 내리면서 촉발됐다.

최근 전 세계가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것 역시 40년 가까이 지속된 저금리 기조에 젖었던 탓에 조기 대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겹치면서 유동성이 추가로 풀린 탓도 있지만, 금리가 갑자기 오르지 않을 거란 근거 없는 낙관도 한몫했다고 본다.”

-위기가 주는 교훈은 뭔가?

“경제 상황이 긍정이어도 지금의 유리한 환경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란 낙관에서 벗어나야 위기를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는 배움을 얻었다. 고정 관념을 두는 순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네 번의 큰 위기에서 배운 것은 관성이 매몰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기 앞에 나타나는 징조가 따로 있나?

“경험적으로 봤을 때 하나의 자산이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면 위기로 이어지곤 했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엔화 초강세도 그랬다. 엔화 강세가 지속될 때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어려웠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난다. 순간 대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외환위기 같은 것을 겪는 것이다.

닷컴 버블 붕괴 때도 기술주 폭등이란 쏠림이 극심했다. 시장을 조절하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2000년을 앞두고 지구촌, 그중에서도 글로벌 금융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은 ‘떡밥’ 같은 ‘Y2K(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해 컴퓨터가 오작동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염려가 극심한 상황에서 긴축 재정은 쉽지 않은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실물경기가 다칠까 봐 미 연준도 금리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 사이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엔 거품이 꼈고, 2000년이 지난 뒤 연준이 서둘러 금리를 올리면서 거품이 급속도로 빠지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도 부동산 자산 쏠림이 계속된 뒤 터졌고, 주식 시장 호황으로 증시에 유동성이 쏠리고 난 뒤엔 인플레이션 위기가 찾아왔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어떤 위기였나?

“전과 형태가 다른 위기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위기다.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연준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코로나가 일상적인 수준의 질병으로 격하됐지만 여전히 여파가 큰 것은 빚이 많을 때 찾아온 위기였기 때문이다. 빚이 많은 상황이다 보니 코로나에 따른 경제 활동 위축은 가계와 기업의 파산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나라마다 경제가 돌아갈 수 있게 돈을 풀어 보조금 지원에 나섰고 코로나가 금융위기로 전이하는 건 차단할 수 있었지만, 부작용은 이때부터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유례없는 경기부양의 명분을 제공했다. 유동성을 앞세운 경기 부양의 이면엔 40년 만에 인플레 후유증을 낳고 말았다.”

-경제 사이클은 반복된다. 다음 사이클은 어떨까?

“지난 10년은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가 굳건했던 시기다. 가까운 미래는 지난 10년보다는 성장률도, 물가도, 금리도 모두 조금씩은 오른 채로 상당 기간 유지될 것 같다.”

오건영 신한은행 WM사업부 팀장 /전태훤 선임기자

-금리, 물가 전망은?

“금리나 물가를 전망하려면 미국 상황을 먼저 봐야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도 물가가 최근 상당 수준 떨어지긴 했지만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연준이 목표로 하는 2%를 넘어서고 있다. 특히 변별력이 있는 물가가 중요한데, 그중 대표적인 임금은 여전히 상승세다. 쉽게 말해 일반 물가를 잡아도 임금 같은 핵심 물가를 잡지 못하면 인플레를 완전히 잡았다고 볼 수 없다는 거다. 연준은 인플레 불씨를 남김없이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러려면 실제 금리를 내리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연준 인사들을 봐도 그렇다. 금리 인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매파나 그 반대쪽인 비둘기파 양쪽 모두를 살펴봐도 금리를 내리자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현재 수준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더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다.

한국도 물가가 어느 정도 잡혔다고는 하나 막상 금리를 내리기 쉽지 않을 거다. 더 올리기엔 실물경기가 위축될까 우려되고, 내리자니 미국과 금리 차이가 벌어지는 게 걱정되기 때문이다.”

-9월 위기설의 실체와 한국 경제의 위협 요소는?

“역설적이지만 위기라고 특별히 거론되는 것들은 진짜 위기가 아니다. 자영업자 연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문제 등이 위기 요소로 대두됐지만 이런 부분은 상당 수준 이상 관리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침체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이다. 금융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수출이다. 무역의존도가 큰 중국과의 무역 위축이 걱정거리다. 대중 수출 감소는 잠재 성장률을 낮추게 될 거다. 결국 저성장으로 가게 되고 한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게 될 우려가 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이런 무색무취의 위협 요소들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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