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그 건축가의 이름은 어디로 갔나
작가를 호명하지 않는 ‘관행’
건축가도 창작자로 존중해야
이름 불러주는 게 그 시작
‘마지막 모더니즘 건축가’ 이오 밍 페이(I.M.Pei)가 2019년 102세로 타계했을 때 부고 기사를 썼다. 페이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루브르박물관 유리 피라미드겠지만, 여러 작품을 조사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그가 전통과 첨단의 조화라는 주제를 먼저 구현한 워싱턴DC의 내셔널갤러리 동관이었다. 페이는 고풍스러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관 옆에 동관을 현대적으로 디자인했다. 두 건물 사이엔 오늘날 크리스털이라고 불리는 유리 구조물을 만들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1980년대 초 이곳을 방문한 뒤 페이를 루브르의 건축가로 지명했다.
지난해 그곳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피카소와 클림트 작품 못지않게 감동적인 장면을 로비에서 만났다. 기둥에 대문자로 새긴 건립 관계자들 이름 가운데 ‘I.M.PEI’만 까맣게 얼룩져 있었다. 관람객들이 수십 년 쓰다듬어 생긴 손자국이라고 했다. 국내에선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건축가 이름을 새기지도 않지만 거기에 애정 어린 손길이 이어지는 것은 더 상상하기 어려워서 기억에 깊이 남았다.
그러다 건축가 이승환이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보면서 이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역시 건축가인 아내와 운영하는 회사에서 최근 완성한 작업을 소개한 글이었다. ‘어느 건축가의 흔적’은 김중업(1922~1988)의 초기 걸작인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철거된 부재를 안양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야외 전시로 재탄생시킨 프로젝트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대사관에서 기둥과 외벽 마감재 등을 기증했다. 건축 폐기물이 아니라 우리 현대건축 선구자의 디자인 원형을 보여주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빠듯한 예산이었지만 큰 틀에서 중요한 몇몇 아이디어는 지켜낼 수 있었다”고 썼다. 대사 집무실에 가로세로 4.5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기둥의 모듈(배치 형태)을 재현한 것이 그중 하나라고 했다. 물려받은 유산을 다른 맥락에서 다른 작품으로 만든 것은 새로운 창작이다. 그러나 이달 초 개막식에서 자문위원들을 하나하나 내빈으로 소개하면서도 건축가는 호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건축가의 이름을 딴 박물관에서 건축가가 디자인한 전시를 개막하면서 건축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지난여름 안도 다다오가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강연했을 때 2700석이 가득찼다. DDP나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언제나 자하 하디드나 데이비드 치퍼필드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라는 수식어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건축가의 흔적’ 에피소드에 대한 건축계의 반응은 대체로 ‘서글프지만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새롭지는 않다’였다. 어쩌면 우리는 건축가의 이름보다 외국 스타 건축가의 유명세에만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건축가를 특별히 대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건축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도시 풍경의 많은 부분이 익명의 디자인으로 남는다. 그보다는 건축가를 창작자로서 존중하고 이름값에 걸맞은 책임감과 좋은 디자인을 요구하자는 것이다. 음식점을 고를 때도 간판에 이름을 내건 곳은 그만한 자부심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건축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작이다.
지난 주말 김중업건축박물관을 찾아갔다. 김중업이 설계한 옛 유유산업 공장 건물을 새단장해 조성한 곳이니 전시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대사관 기둥 조각을 잘라 만든 벤치에 앉아서 김중업이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했다. 이곳에선 자신이 주인공이고 자신만이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작품에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작가로서 후배 건축가가 존중받기를 김중업도 바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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