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 없는 R&D예산 대폭 삭감… 정부 발표에 의존하지 말고 현장 의견 들어야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회(위원장 김도연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가 지난 11일 정례회의를 열고 지난 한 달 조선일보 지면과 온라인 기사에 대해 토론했다. 김 위원장을 비롯해 고산(에이팀벤처스 대표), 김별아(소설가), 김재련(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민세진(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장부승(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 정윤혁(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한준(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위원과 조중식 편집국 부국장이 참석했다. 금현섭(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김태수(변호사), 박상욱(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원호(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위원은 따로 의견을 보냈다.
[사설]
-신문 사설(社說)의 목적은 여론을 이끌어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지난 한 달간 조선일보에 실린 70여개 사설을 보면 대부분 사회적 병폐를 지적하고 치유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야당 대표를 비롯해 정치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압도적이었다. 사회의 잘못된 관행·제도를 질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독자로서는 사회의 어두운 면만 대하게 되어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社說] 정치가 끼지 못하게 막아야 일이 된다는 걸 보여준 교권 운동>(9월 4일 자)은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일을 격려하는 메시지였다. 사회를 밝히는 이슈를 많이 발굴해 사설 주제로 삼았으면 좋겠다.
-<막내가 56세... 치안 최전선 파출소도 고령화>(9월 8일 자 A2면)는 국민의 일상 치안을 책임지는 지구대·파출소가 고령화되는 현상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으로 치안 인력 재배치를 제시했는데 이는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인력 배치나 운용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별 인력 구조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리자급인 경감·경위는 정원보다 2~3배 많지만 일선 치안을 담당하는 경장·순경은 정원 미달인 것이 문제다. 경찰은 대표적인 피라미드 구조인데, 실제로는 중간 인력이 많은 항아리형 구조라는 것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은평 흉기 난동범에 치킨·소주 준 경찰>(8월 28일 자 A12면)은 주택가에서 흉기 난동을 부리던 남성을 경찰이 3시간 가까이 대치하다가 설득 끝에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치킨과 소주를 사주었다는 내용이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해 소동을 마무리한 것인데, 테이저건을 사용해 빨리 진압했어야 한다는 것인지, 절대로 난동자에 휘둘리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인지 기사의 취지와 방향이 모호하다.
[방범]
-<35만㎡ 말죽거리 공원엔 방범카메라 하나 없었다>(8월 24일 자 A12면)는 흉악 범죄 현장이 된 도심 공원을 찾아가 방범 상태를 취재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라도 철저히 점검해 고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장을 발로 뛰는 기사가 좋다.
-<학폭 있으면 大入 특정 전형에 지원 못한다>(8월 30일 자 A14면)는 2026년 대입부터 모든 전형에 학폭 반영을 의무화하는 등 대입 기본 사항을 소개했는데, 정부 방침에 허점이 많다는 내용이 빠져 아쉽다. 먼저 미성년자가 범죄 행위를 했을 경우 소년보호사건으로 처리하는데, 이때 보호처분 기록은 어디에도 오픈되지 않고, 대입에도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경미한 학폭 기록이 대입 지원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 또는 차별 소지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각급 학교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도 구성 자격이 검증되지 않은 곳이 많고, 학폭에 대한 통일된 기준조차 없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교권 침해 학생, 입시 불이익 준다>(8월 15일 자 A1·3면)에 나온 교육부의 교권 회복 방안을 보면 실효성에 의문이 가는 항목이 많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문제의 학부모에게 서면(書面) 사과를 법으로 강제하겠다고 하는데, 서면 사과가 어떤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서면 사과를 의무화하는 것은 양심에 반하는 사과는 강제하지도 못하도록 하는 헌법에 위배될 수 있다. 또 아동 학대는 과실범이 아나고 고의범인데, 중과실이 없으면 처벌을 면제한다는 조항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서울시가 위안부 추모공원에 있는 임옥상의 작품을 철거하면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그런데 <’성추행’ 작가 작품 지키는 여성단체들>(9월 5일 자 1면) 제목은 선정적으로 보인다. 인터넷판 제목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임옥상 작품 철거 저지, 박원순 때 침묵 여성단체들 기이한 집회> 이런 제목은 논점을 흐린다. 이 사안은 문제가 되는 인물의 작품을 핵심적 공간의 상징으로 남겨둘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작품을 구분해 개인의 범죄 행위와 그의 작품 평가를 어떻게 분리·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장인까지 한국 모셔와 건보 1억 빼먹었다>(8월 23일 자 A12면)는 기사 내용과 일러스트가 맞지 않는다. 기사에는 중국 국적의 건보 가입자가 전체 외국인 중 53%로 가장 많다고 지적했는데, 일러스트에는 ‘노랑 머리’와 ‘큰 코’로 상징되는 서양인들이 대다수이고, 미국·네덜란드·독일 국기 비슷한 것들이 그려져 있다.
[산업단지]
-<슬럼화된 ‘3老 산업단지’ 전국에 417곳>(8월 18일 자 A1면)에서 시작된 노후 산업단지 관련 기사는 현장을 직접 뛰는 취재와 문제 발굴, 구조적인 분석과 정책적 대안까지 제시한 모범 사례였다. 지역 주민이 아니면 구체적으로 알기 힘든 문제인데, ‘3老(제도·시설·인력) 산업단지’로 규정하면서 구조적 문제들을 제시했다. <기업 841곳 품은 미래형 건물.. 5t 트럭이 10층 오간다>(9월 4일 자 B1면)에서 모범 사례인 반월·시화 산단을 통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고, <노후 산업단지 업종제한 푼다>(8월 25일 자 A1면)와 <지방 산단에 첨단기업 입주... 상가도 생긴다>(8월 25일 자 A6면) 등 규제를 푸는 정부의 정책적 반응까지 이끌어냈다.
-노후 산업단지 점검 기사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산업단지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으로 눈에 띄었다. 언론은 평소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만들어진 산업의 중요성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선배 세대가 구축한 산업단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부 대책의 하나로 사업장 외국 인력 고용 한도를 2배 이상 확대한다는데, 그럴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나 등의 의문을 던져야 한다. 노후 산업단지 재개발과 관련, 국토부와 산업부 간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유사·중복·뿌려주기’ 연구비 예산, 1조8000억 줄인다>(8월 23일 자 A6면)는 지난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의 ‘연구비 카르텔’ 지적 이후 정부가 황급한 조정을 통해 내년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는 1998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R&D 예산은 늘어났다. 내년 전체 예산이 2.8% 증가했는데도 R&D 예산을 16.6%나 감축한 것은 R&D의 가치를 제일 바닥에 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들게 한다. R&D 분야에서 비도덕적·비효율적인 것은 당연히 제거해야 하지만 기사는 예산 삭감 현장 의견은 없이 정부 발표에만 의존한 것 같다. 예산 삭감에 대해 R&D 현장 의견을 포함해 연구비 카르텔에 대한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유통규제]
-<월마트도 밀어냈던 유통업, 10년간 오히려 후퇴했다>(8월 31일 자 A10면)는 유통업 규제로 대형 마트의 경쟁력이 약화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래픽에는 전체 유통 산업 중 온라인 쇼핑과 대형 마트 비중을 비교하면서 대형 마트의 쇠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대형 마트 역시 온라인 쇼핑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을 대립 구도로 풀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형 마트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어야 하지만, 온라인 시장 확산에 따른 오프라인 시장 쇠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된다. 요즘 대형 마트가 온라인 쇼핑 쪽으로 많이 진출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기사에 반영하지 않아 아쉬웠다.
-<일본이 장악한 7억 인구 車시장(아세안), K전기차로 돌진한다>(9월 6일 자 B1면)에서 현대 아이오닉5가 인도네시아 전기차 1위라고 소개했다. 그래픽을 보면 일본 도요타가 인도네시아에서 363대, 한국 현대차가 3913대 팔았다고 되어 있다. 그래픽 상단에 ‘전기차 판매량’이라고 작게 적혀 있기는 하지만, 얼핏 보면 현대차가 도요타보다 자동차를 10배 이상 팔았다는 느낌을 준다.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일본이 91.4%, 한국이 3.4%다. 전기차에 국한하면 ‘돌진’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전체 시장에서 일본차가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는 상황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한국차를 너무 장밋빛으로 묘사한 것 같다.
-<가계빚 급증 주범?... ‘50년 만기 주담대’ 줄줄이 중단>(8월 24일 자 B2면)은 금융 당국이 최근 가계빚 급증세를 부추긴 요인 중 하나로 50년 만기 대출을 지목하자 은행들이 판매 중단을 선언하거나 가입 요건을 강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불과 한 달 전에 안내 기사가 나왔는데, 정부의 말 한마디로 상황이 뒤집힌다는 게 황당하다. 정부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 총부채원리금 상환비율(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지 점검하겠다고 했는데, 이 우회가 왜 나쁜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정부 발표는 주택 가격 급등으로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상황에서 주거 취약층이 집을 사는 접근로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DSR을 우회하는 게 왜 나쁜지에 대한 기사가 필요하다.
[20대 빚]
-<빚의 늪에 빠진 20대, 연체율 전연령대서 가장 높아>(8월 29일 자 A2면)가 실렸는데, 빚은 20대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일단 소득이 적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대가 무책임하다라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기사가 나오는 건 문제다. 이 기사 아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앱만 터치하면 수백만원 대출>은 금융 교육의 필요성을 지적했는데, “너희들 왜 대책 없이 빚내고 연체하니”라고 비난만 하면 상황 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 더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에스프레소] 회사에서 반바지는 여전히 금기인가>(8월 18일자 A31면) 칼럼에 이어서 기자의 체험을 소개한 <양산·반바지·장화 차림으로 출근...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다>(8월 19일자 ‘아무튼 주말’ B3면)는 현장감 있고 재미도 있었다. 보수적으로 알려진 조선일보라서 사회적 통례에 도전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이런 체험형 기사가 더 유의미하다. /정리=김정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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