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깊은 밤, 책에서 나오는 친구

김희선 소설가·약사 2023. 9.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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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구매 행위의 80%는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오래전 인터넷 서점에서, 역시나 ‘무의식 상태’에 빠져 구매한 ‘지식ⓔ’라는 책에서 읽은 문장이다. 책과 음반, 문구류를 살 때 무의식 상태에 잘 빠지는 편이다. 특히 책을 살 땐 거의 꿈속에서 손가락을 클릭한다. 오히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그렇게까지 몽롱해지지 않는데, 아무래도 고른 책을 손에 들고 돌아다녀야 하기에, 그 무게가 약간이나마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기 때문 아닐까. 손에 든 책이 무거워서 어느 정도 고르면 결국 책 구매 행위를 멈춰야 하니 말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한없이 장바구니에 책을 담을 수 있다. 수백 권이 담겨도 전혀 무겁지 않은 것이다.

카드로 결제할 때 ‘이렇게나 많이?’라고 약간 놀란다. 꼭 필요한 책을 하나 고르기 위해 접속했다가, 이리저리 연관된 링크를 따라 헤매 다니며, 나중엔 왜 골랐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책까지 다 사고 나면, 어느새 하루는 저물고 창밖엔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덕분에 책장은 언제나 포화 상태고, 집 곳곳엔 연필이나 각종 영수증 조각을 서표 대신 끼워둔 책들이 이리저리 난무한다.

집 안 가득한 책을 보며 항상 느끼는 건 그나마 내가 탐닉하는 대상이 책과 문구류인 게 다행 아니냐는 안도감이다. 만약 주량이 세서 술에 탐닉했다면 이미 알코올 중독에 빠졌을 테고, 게임에 솜씨가 있었다면 밤새 잠도 안 자고 모니터만 들여다보다 쓰러진 채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한 신체를 타고 태어났고, 게임을 잘 배워 볼 만큼 끈기 있는 성격도 가지지 못했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수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재엔 특히 읽지 않은 책들만 가득 꽂아두었다고 한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에코는 이런 대답을 했다. “여기 꽂아둔 책들에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나와 내 머릿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짓궂게 씨익 웃었다고 하는데−왜냐하면 언제나 뻔한 걸 묻는 이들에게 들려주던 농담에 불과하니까–사실, 정말로 그렇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책장 가득한 책들에서 밤마다 뭔가가 흘러나와 우리 머릿속, 마음속으로 스며든다는, 그 신비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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