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산책] 헤어짐에 대하여

이공우 2023. 9.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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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우 한림대 연구교수

며칠 전, 수십년간 끌고 다녔던 신문 스크랩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현직에서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가장 먼저 챙긴 이삿짐이었고, 퇴직한 후에도 비좁은 서재 한켠을 넉넉히 차지하고 있던 수십권의 파일(file)입니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뒤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영감을 얻었던 고담준론(高談峻論)의 글들이고, 촌철살인의 세평들이고, 신지식·신문명을 일깨워 준 귀중한 자료들의 모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껏 껴안고 있었던 이유는, 솔직히 그런 고상한 배경에서가 아닙니다. 곳곳에 ‘내가 정성껏 쳐놓은 밑줄’ ‘내가 꼼꼼히 적어 넣은 메모’ 때문이라는 게 더 옳을 것입니다. 그 손때 묻은 흔적에 배어있는 내 젊음, 내 정열, 내 꿈의 세계에 대한 끈적끈적한 정(情)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물욕이요, 집착이요, 미련이요, 허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나를 과거의 시간에 가두어 놓은 ‘헌 옷가지’ 같은 잡동사니에 불과한데 말이죠.

일본인 소설가 ‘소노 아야코’가 쓴 ‘계로록(戒老錄)’이라는 에세이집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지요. 이 책은 작가의 나이 마흔 살이 되던 1972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아직도 책방의 인기 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니, 명실공히 스테디셀러(steady seller)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작가의 서문과 후기가 세개씩 있습니다. 출판 10주년에 한번, 작가가 일본의 법적 노인인 65세가 되던 1996년에 또 한 번의 서문과 후기를 추가한 결과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에는 ‘훌륭하게 늙어가는 일’에 대한 작가의 많은 사색이 담겨 있습니다. ‘늙어가며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소망에서부터, 주변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 130여 개를 담아냈습니다. 작가는, 그 모든 담론의 공통적 사유(思惟)가 ‘허용, 납득, 단념, 회귀’라고, 그의 두 번째 후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이 네 가지의 철학적 맥락이 ‘몰아(沒我)’에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경지’란, 곧 ‘어제의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에서부터 생각하는 방식, 소소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나 중심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 떠난다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삶의 궁극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반복해 나가는 일상이면서도, 성숙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도(道)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목을 시작할 때, 이 세상 부모 곁을 떠났습니다. 불가에서도 수행자로서의 시작을 출가라 합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나기’가 수행의 시작인 것이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할 때는 자식도 있었습니다. 그 자식의 이름 라훌라(Rahula)는 흔히 ‘애물’, ‘애를 태우게 하는 물건이나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버리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인연 화위진(一切因緣 化爲塵)’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낮 티끌처럼 변할 모든 것들… 내 일생이 담긴 사진첩도, 내 자식에게조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 이름도 알 수 없는 타인들의 모습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던 것이니 함부로 할 수도 없는 골칫거리겠지요. 방안 가득히 쌓인 책을 포함해서, 하루빨리 몽땅 버리긴 해야겠는데…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죽음이 슬프고 두려운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피안 저쪽에 타오를 또 다른 생명의 불꽃에 대한 의문 때문이 아니라, 정들었던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 헤어져야 한다는 그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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