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세력보다 사회 중시… 에도 내준 가쓰의 ‘질서 있는 퇴각’[박훈 한국인이 본 일본사]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역적이다.’ 쿠데타로 천황을 손아귀에 넣은 그들은 하루아침에 ‘관군’이 되어 ‘역적’ 도쿠가와 세력을 치러 에도로 행군했다.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갑자기 막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가쓰 가이슈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 덕에 승진을 거듭했지만, 막부 주류 세력을 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막부의 여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부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김광진 ‘편지’). 권력에 대한 미련은 연인보다 더 질긴 법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그걸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거니와, 통찰했다 해도 미련을 끊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진영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
막부 주류 세력들은 그의 노선을 경멸하고 한직으로 내쳤다. 좌절하지 않고 해군 건설에 뛰어들었다. 자기를 내쳤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작은 해군조련소 설립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머지않아 막부도 번(藩·봉건국가)도 없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할 터인데, 그 일본을 지켜주는 것은 해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다. 젊은 료마는 누나에게 “요즘은 천하에 둘도 없는 군학자(軍學者) 가쓰 린타로(가쓰 가이슈)라는 대선생님의 문인이 되어 굉장히 귀여움을 받고 있어. (중략) 가까운 장래에 오사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해군을 가르칠 곳을 설립하고, 80m, 90m 정도 되는 배를 만들 거야. 제자들도 400∼500명 정도 각지로부터 모여들고 있어”라고 하며 신나했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가쓰는 반막부세력의 중심인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도 친교를 맺었다. 1864년 사이고를 만나 막부독재를 허물고 웅번(雄藩·큰 봉건국가들) 연합정권이 세워져야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놀란 것은 사이고였다. 그는 이를 ‘공화정치’라 명명했다. “(가쓰는) 실로 놀라운 인물로,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시기 최고의 양학자)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 버렸다”고 토로했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 “그(사이고)를 만나 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나았지만, 이른바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
끝까지 ‘패자의 품격’을 지킨 가쓰
가쓰는 패자의 품격을 지켰다.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막부군을 끝까지 설득했고, 막부 가신들을 이끌고 도쿠가와 세력의 본거지 시즈오카로 선선히 물러났다. 막부 가신들은 그를 사쓰마, 조슈와 타협해서 막부를 팔아먹은 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거듭된 입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가 한 일은 주군을 잃고 가록(家祿)을 잃어, 명예도 생계도 막막해진 막부 가신들과 그 식솔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는 승리한 세력의 행태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패배하는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 대세를 읽지 못하고 무모한 집착을 부리면, 무고한 인명은 손상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커진다. 물러나면서 행한 총질로 폐허가 되면 사회 재건은 그만큼 어렵다. 자기 세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끊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가쓰 가이슈가 이끈 ‘질서 있는 퇴각’이 일본을 살렸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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