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3A.M.] 훌륭한 기획자는 훌륭한 프레이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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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을 기점으로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이 뜨거운 여름을 두고 '지구 온난화'라는 말은 미지근하고, '기후변화'라는 말은 건조했다.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 시대가 왔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라.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더 이상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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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가장 빛나게 할 표구작업
이 말은 어떻게 갑자기 쓰이기 시작했을까. 진원지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올해 7월이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운 달이 될 것이라는 공식 데이터를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지난 7월27일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 시대가 왔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라.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지구 열대화라는 말은 1990년대부터 국제기구 보고서에서 가끔 쓰이긴 했다. 여전히 기후변화가 사기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유엔의 수장이 이런 자극적이고 종말론에나 쓰일 단어를 써도 되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지구 열대화’라는 말이 이렇게 빨리 널리 확산된 것은 구테흐스의 표현이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하다는 공감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과 행동에는 늘 괴리가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먼저 사람의 생각을 돌파해야 한다. 인식을 바꾸는 일은 제대로 정의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언어를 선점하는 일이다. 최근 벌어진 ‘오염수 대 처리수’ 논쟁도 말의 전쟁이자, 인식의 전쟁이다.
역설적이나, 기후변화라는 말은 에너지 기업과 미국의 보수 정치세력이 기획한 것이다. 핵심인물은 조지 부시 정부의 어둠의 실권자 딕 체니 부통령이다. 그의 전기영화 ‘바이스’에 따르면 체니가 주도한 싱크탱크에서 열리는 수요미팅은 당시 공화당 세계의 중심으로, 감세를 비롯한 공화당 정책을 관철할 방안을 논의했다. 컨설턴트, 홍보·마케팅 전문가들이 포커스그룹인터뷰(FGI)를 하면서 대중의 인식을 바꿀 효과적 언어를 검증했다. 그 결과 고액 부동산을 물려주는 사람에게 부과되는 세금에 상속세 대신 ‘사망세’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구 온난화’라는 말은 공포감을 줄 수 있다며 ‘기후변화’라는 말로 대체했다.
최근 교사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초등교사 커뮤니티 인디스쿨은 기존 교사 단체나 노조와는 다른 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쓰는 말도 다르다. 숨진 서이초 교사의 49재를 맞아 교사 일을 하루 쉬고 추모 집회에 모이자는 날은 ‘공교육 멈춤의 날’이라고 이름 붙였다. 파업, 휴업 같은 익숙한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탈정치를 원칙으로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고, 철저히 교권침해로 이슈를 집중하겠다는 전략이 보인다.
위기대응 전략을 조언한 기업에 ‘첫 한시간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제안한 적이 있다. 위기대응에서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그 첫 한시간에 당황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적은 것이다. 그중 컨트롤타워를 맡은 경영진이 해야 할 일의 1순위가 충분히 보고받았는지 확인한 뒤, 초기 서사를 정리하라는 것이다. 회사 안에서 위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먼저 합의해야 대응할 방법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초기 서사를 사내에 충분히 전파해야 구성원들도 서로 딴 얘기를 하지 않고 외부에 일관된 목소리로 설명할 수 있다.
프레이머(framer)라는 직업이 있다. 사진, 그림과 같은 예술 작품이 가장 잘 빛나도록 표구하고 틀을 골라 액자에 담아주는 일이다. 훌륭한 기획자는 훌륭한 프레이머다.
이인숙 플랫폼9와4분의3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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