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 깎여 기존 노력들 물거품 될 우려…이러다 한국 망해요”
“과학자들은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못하게 됐네’ 같은 걱정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가다간 한국이 망하게 생겼다고 보고 있어요.”
지난 13일 대전에서 만난 이어확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공동대표(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의 표정에서는 위기감이 짙게 묻어났다. ‘과학기술 입국’을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실망감도 내비쳤다.
그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연대회의는 지난 5일 출범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등 10개 단체가 참여했다. 연대회의의 목적은 명확하다. 정부가 지난달 29일 삭감한다고 발표한 내년 R&D 예산을 복원하는 일이다. 내년 정부 R&D 예산은 올해보다 16.6%나 축소돼 편성됐다. 1991년 이후 정부 R&D 예산이 줄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학기술계가 특정 정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표적인 연구 조직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는 과거에 임금이나 정년 축소 문제가 불거진 때도 집단반발 움직임은 찾기 어려웠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자이기도 한 이 공동대표는 “과학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지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뭉치기가 굉장히 힘들다”며 “지금은 마치 홀린 듯이 자연스럽게 뜻을 모으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공동대표는 “연대회의의 구성을 살펴보면 노조만 모인 조직이 아니다”라며 “박사급 연구원 2600여명이 모인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와 같은 조직도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공동대표는 정부가 내년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과학기술계에 ‘카르텔’이 있다고 한 점도 강하게 성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 여권에서는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한국선 승인받아야 연구 가능…카르텔? 관리기관의 자기부정”
“과기정통부, 예산 삭감 맞춰
뒤늦게 논리 개발·사례 조사”
‘예산 복원’ 목적으로 연대
“국회 예산 심사 압박 예정”
현재 과학기술계 안팎에선 카르텔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카르텔을 연구 현장에서의 비효율적 예산 사용과 비슷한 의미로 쓴다. 하지만 카르텔은 특정 주체가 독점적인 이득을 꾀하려는 의지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예산 집행의 비효율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반발이 제기된다.
카르텔이든 비효율이든, R&D 예산 삭감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부의 논리에는 허점이 있다고 이어확 공동대표(사진)는 지적했다. 이 공동대표는 “올해 31조원에 이른 정부 R&D 예산에서 카르텔이라며 거론되는 사례가 대개 수억원짜리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과기정통부가 삭감된 예산 숫자에 맞게 뒤늦게 논리를 개발하고, 사례를 조사하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공동대표는 애초 연구자들이 카르텔을 만든다는 일 자체가 한국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표적인 연구 조직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예로 들며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관리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과기정통부에서 어떤 연구를 해도 될지 등을 승인받아야 한다”며 “예산을 맡고 있는 기획재정부를 설득하고 감사원이나 국회의 지적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공동대표는 “(카르텔이란 표현 자체가) 관리기관들의 철저한 자기부정”이라고 반박했다.
만약 정부 생각대로 R&D 예산이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는 순수하게 R&D에만 쓰는 ‘주요 사업비’가 약 25% 감소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 공동대표는 “주요 사업비가 25% 줄어들면 연구 역량이 25%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라며 “지금까지 진행하던 연구가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에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작 결과물이 나올 단계에서 연구비가 뚝 끊겨 과거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R&D 예산이 전체적으로 줄었지만 이른바 국가의 먹거리에 해당하는 반도체 등 ‘전략기술’에 대한 투자는 늘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공동대표는 이 사안에도 반박했다. 그는 “(전략기술 중 하나인) 양자 기술의 경우 양자컴퓨터를 위한 초저온 냉각 기술이나 소재 기술이 같이 필요하다”며 “기술의 융합이나 연계를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는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두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며 출범했다. 그런데 1년 남짓 만에 R&D 예산 대규모 삭감으로 돌변한 데 대해 이 공동대표는 “과학기술은 눈에 띄는 성과가 당장 나오는 분야가 아닌데, 이런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R&D 예산 복원을 위해 일단 국회를 상대로 한 움직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공동대표는 “국회 예산 심사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이번 R&D 예산 삭감에 대한 생각을 물을 예정”이라며 “의원들이 내놓는 대답을 국민에게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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