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지 않은 회화세계 구축… 한국 실험미술 선구자 궤적을 좇다

김신성 2023. 9. 1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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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김구림전’
퍼포먼스·회화 등 다양한 미술 장르부터
무용·영화·연극·음악까지 폭넓게 활동
1950년대 개인전 이후 작품 230여점 전시
탈회화적 제작 ‘핵1-62’·시간에 천착 ‘걸레’
캔버스와 오브제 결합 ‘음과 양’ 연작 망라
새로운 담론 진행형인 작가 행보 한눈에

패널 위에 비닐을 덮고 석유를 바른 뒤 불을 붙인다. 타오를 때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면 남은 흔적이 그림이 된다. 작가는 이를 가리켜 “회화가 아닌 회화, 즉 그리지 않은 회화”라고 설명했다. 그가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이다.

김구림은 1950년대부터 다양한 매체, 장르, 주제를 넘나들며 예술의 최전선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했다.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미술의 범주에서뿐 아니라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활동을 펼쳐왔다

1950년대 한국 미술계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앵포르멜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구림은 여타 앵포르멜 작가들과 달리 붓을 사용하지 않고 퍼포먼스와 같은 행위를 통해 비정형의 화면을 구축해냈다.
‘핵1-62’
‘핵1-62’는 1960년대 그의 탈회화 제작방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는 제작 동기로 1950년대 경험한 전쟁의 참상과 충격, 청춘기의 불안정성을 회고한다. 흑색조의 화면과 그을린 비정형의 흔적은 작가 내면의 반영이다. 혼란한 전후 시대에 침잠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김구림과 동시에 시대에 반응하며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작가로서의 김구림이 모두 드러난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이 내년 2월12일까지 여는 ‘김구림’ 전에 가면, 총체 예술가로서 김구림의 미술사적 성과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담론과 연구를 지속 생성하는 현재진행형 작가로서 그의 행보를 살펴볼 수 있다. 제6, 7 두 개의 전시실에서 작가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하는 230여 점의 작품과 60여 점의 아카이브 자료가 관람객을 맞는다.
‘1/24초의 의미’
16㎜ 필름으로 촬영한 ‘1/24초의 의미’는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에 기반해 제작한 실험작이다. 김구림이 직접 제작, 감독, 편집, 디자인을 맡았다.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고층빌딩, 육교, 옥외광고판, 방직공장 등 빠르게 변모하던 서울의 모습을 속도감 있게 담고 있다. 영화 속 남성의 하루는 하품과 흡연 등 일상적 행위로 채워졌는데 그의 동작은 매우 느리게 표현된다. 영화는 1초 간격으로 바뀌는 이미지들을 조합해 통제 불가능한 현대 도시와 그 속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현대판 룸펜의 모습을 병치시킨다. 상관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흑백과 컬러 이미지의 조합은 현대인이 경험할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1969년 7월21일 서울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처음 상영될 계획이었으나 기술 문제 탓에 ‘무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로만 선보였다. 김구림과 정강자가 흰 타이츠를 입고 ‘움직이는 스크린’이 되었고 그 위로 영화에서 추출한 컷으로 만든 슬라이드 이미지들이 투사됐다.
‘걸레’
김구림은 1970년대에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시간성에 천착한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1974년 제작된 ‘걸레’는 때가 묻은 탁자를 닦음으로써 흰 천이 걸레가 되고 종국에는 천이 닳아 걸레 조각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시간의 경과와 그 흔적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킨다. 시간과 변화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걸레’는 잔디를 태우고 새로운 잔디가 돋아나는 과정을 작품으로 제시한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현상에서 흔적으로’가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온전히 작품으로 옮긴 경우라면, ‘걸레’는 비디오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 실제 걸레가 낡아 해어지기까지 걸리는 몇 달, 몇 년의 시간을 2분 7초라는 짧은 재생 시간으로 압축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1970년 4월11일 발표 당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라는 부제가 있었다. 김구림은 한양대 앞 강나루 건너편 살곶이 다리 옆 100m 경사면에 종이노끈과 못으로 7개의 삼각형을 만들고 잔디에 불을 놓았다. 대보름에 논과 밭을 태우는 쥐불놀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같은 물질과 상황에서 다른 현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7개의 삼각형 속 잔디는 본디 같은 물질이었으나 태우는 행위를 통해 불타버린 잔디는 푸르른 잔디와는 다른 ‘현상’으로 보인다. 검은 잔디는 시간이 흘러 새싹이 돋아나도 본래의 잔디와는 다른 색을 띠며 불의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남게 된다. 이 작품은 ‘과천 30년 기념 퍼포먼스: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공원, 2016)에서 재연된 바 있다. 푸른 삼각형과 검은 삼각형은 삶과 죽음, 음과 양의 개념이다. 김구림이 1960년대 초반 탐구했던 실존 문제뿐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선보인 ‘음과 양’ 연작의 방법론-자연과 문명의 대비, 이질적인 것의 병치-과도 연결된다.

세월을 건너 1989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LA)로 작업실을 옮긴 김구림은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오브제를 도입해 재현 방식을 달리하거나 상반된 개념을 충돌시켜 문명에 대한 통찰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음과 양 91-L 13’
‘음과 양 91-L 13’은 두 개의 캔버스와 낚싯대, 물통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불타오르는 사실적인 고층빌딩 옆에 나란히 위치한 주황색 캔버스는 화재의 긴박함을 더욱 고조시킨다. 오브제인 낚싯대와 양동이는 평면이 가진 불의 이미지와 반대로 물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화재를 진압하기에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짐짓 여유롭기까지 한 물의 이미지가 건물을 집어삼킬 듯한 일촉즉발의 불의 이미지와 만나 서로 부딪치며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이러한 상반된 속성의 대비는 작가가 1980년대부터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있는 음양사상에서 비롯한다. 대립하는 양극이 세계의 일부로 공존하는 음양의 이치를 평면과 오브제,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 시각화했다.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구림은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1959년 대구 공회당 화랑에서 ‘김구림 유화개인전’을 개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영화, 연극, 무용 등에 관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60년대 말 ‘회화 68’, ‘AG’, ‘제4집단’ 등 예술집단 활동을 주도하며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실험영화, 대지미술, 해프닝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70년대 일본에 머물며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을 오브제와 설치작품, 판화 등을 통해 탐구했다. 이 시기 전위 작품들은 파리비엔날레(1971), 상파울루비엔날레(1973), ‘김구림전’(일본 도쿄, 1973),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스위스 로잔, 1974) 등 해외 전시에서 활발하게 소개됐다. 1980년대 미국에 머물며 상호모순적인 두 상태를 대비시키고, 나아가 합일에 이르게 하는 ‘음과 양’ 연작을 지속해 선보였으며, 1986년 브루스 나우먼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00년 초대전 ‘현존과 흔적’을 개최하며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음과 양’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12년에는 테이트 모던에서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구사마 아요이, 앤디 워홀 등과 함께 그룹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의 테이트 모던 등 30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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