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지 않은 회화세계 구축… 한국 실험미술 선구자 궤적을 좇다
퍼포먼스·회화 등 다양한 미술 장르부터
무용·영화·연극·음악까지 폭넓게 활동
1950년대 개인전 이후 작품 230여점 전시
탈회화적 제작 ‘핵1-62’·시간에 천착 ‘걸레’
캔버스와 오브제 결합 ‘음과 양’ 연작 망라
새로운 담론 진행형인 작가 행보 한눈에
패널 위에 비닐을 덮고 석유를 바른 뒤 불을 붙인다. 타오를 때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면 남은 흔적이 그림이 된다. 작가는 이를 가리켜 “회화가 아닌 회화, 즉 그리지 않은 회화”라고 설명했다. 그가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이다.
김구림은 1950년대부터 다양한 매체, 장르, 주제를 넘나들며 예술의 최전선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했다.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미술의 범주에서뿐 아니라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활동을 펼쳐왔다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1970년 4월11일 발표 당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라는 부제가 있었다. 김구림은 한양대 앞 강나루 건너편 살곶이 다리 옆 100m 경사면에 종이노끈과 못으로 7개의 삼각형을 만들고 잔디에 불을 놓았다. 대보름에 논과 밭을 태우는 쥐불놀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같은 물질과 상황에서 다른 현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7개의 삼각형 속 잔디는 본디 같은 물질이었으나 태우는 행위를 통해 불타버린 잔디는 푸르른 잔디와는 다른 ‘현상’으로 보인다. 검은 잔디는 시간이 흘러 새싹이 돋아나도 본래의 잔디와는 다른 색을 띠며 불의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남게 된다. 이 작품은 ‘과천 30년 기념 퍼포먼스: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공원, 2016)에서 재연된 바 있다. 푸른 삼각형과 검은 삼각형은 삶과 죽음, 음과 양의 개념이다. 김구림이 1960년대 초반 탐구했던 실존 문제뿐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선보인 ‘음과 양’ 연작의 방법론-자연과 문명의 대비, 이질적인 것의 병치-과도 연결된다.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구림은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1959년 대구 공회당 화랑에서 ‘김구림 유화개인전’을 개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영화, 연극, 무용 등에 관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60년대 말 ‘회화 68’, ‘AG’, ‘제4집단’ 등 예술집단 활동을 주도하며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실험영화, 대지미술, 해프닝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70년대 일본에 머물며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을 오브제와 설치작품, 판화 등을 통해 탐구했다. 이 시기 전위 작품들은 파리비엔날레(1971), 상파울루비엔날레(1973), ‘김구림전’(일본 도쿄, 1973),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스위스 로잔, 1974) 등 해외 전시에서 활발하게 소개됐다. 1980년대 미국에 머물며 상호모순적인 두 상태를 대비시키고, 나아가 합일에 이르게 하는 ‘음과 양’ 연작을 지속해 선보였으며, 1986년 브루스 나우먼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00년 초대전 ‘현존과 흔적’을 개최하며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음과 양’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12년에는 테이트 모던에서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구사마 아요이, 앤디 워홀 등과 함께 그룹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의 테이트 모던 등 30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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