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구국의 지도자’와 엄석대
지난번 칼럼 말미에 썼다. 이러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권력에 과잉 충성하면서 자기 영달에 몰두하는 이를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 ‘쌍팔년도 개그’가 ‘2023년판’으로 리메이크될 줄이야.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의 ‘통일대화’ 자리였다. 국민의힘 3선 경북지사 출신인 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시커먼 먹구름 위에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이 있다”며 “그 먹구름을 걷어내고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신 구국의 지도자, 우리 민주평통 의장이신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했다. 이날 통일대화는 대통령의 통일관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며 ‘이념전쟁’을 이어갔다.
그런 자리에서 ‘용비어천가’라니, 뜬금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위대한 지도자” “민족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따라 하겠다는 건가. 김 부의장 발언은 대한민국을 5공화국·유신시대를 넘어 북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아부에는 장사 없다’라던데, 윤 대통령 기분이 어땠을까.
역사를 보면 ‘입안의 혀’같이 굴면서 농단을 일삼다 권력자는 물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 사례가 적지 않다. 2200여년 전 중국 진나라에서 환관 조고가 황제를 앞에 두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가 대표적이다. 한국 언론이라고 자유로울까. 한 종합편성채널은 2011년 12월 개국 첫날, 당시 유력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씨를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찬미했다. 종편은 이명박(MB) 정부 시절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로 탄생했다. 지금 허위 보도 한 번이면 퇴출시키겠다는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은 MB 정권 때 청와대 홍보수석, 언론특보 등을 역임했다.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 과잉 충성이나 아부 경쟁을 키우는 토양, 예컨대 권력 주변의 에토스(기풍)란 게 있다. 윤 대통령은 상명하복식 검찰 문화가 몸에 밴 인물이다. 여권에선 윤 대통령이 쓴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꽤 들린다. 최근 한 매체가 공개한 통화 녹취를 보면 대선 주자 시절 그는 “제가 들어갔으면 국힘의 101명 중 80명은 앞에다 줄 세웠다”라고 한다. 이런 대통령의 성향과 사고가 권력의 외피를 입으면서 ‘충성! 충성! 충성!’의 동심원들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등 ‘이념전쟁’에서 그 기제가 보인다. “맞서 싸우라”는 대통령의 독려에 육사·국방부·국가보훈부 등이 ‘묻지마 돌격’이다. 국민의힘은 “지켜보겠다”(윤재옥 원내대표)고 한다. 대통령 배우자가 관심을 둔다고 개 식용 금지법을 ‘김건희법’이라고 하는 여당이다.
김 부의장 발언이 있기 바로 전날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의힘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윤심’만 따라가니까 대통령을 두고 엄석대다, 아니다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는 급장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윤 대통령이 엄석대일까, 아니면 김 전 위원장 말처럼 “엄석대를 쫓아낸 자유주의자 선생님”일까. 엄석대가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보복이 두려워 무조건 복종한 반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긴 쉽지 않다. 통일대화든 의원 연찬회든 대통령이 가는 곳에 박수가 넘쳐난다. 그런데 이걸 자신에 대한 온전한 지지로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구름 위’에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지지도가 안 오르는 것에 대한 원망이 ‘날 지지하지 않는 놈들은 반국가 세력 아니야?’로 이어질”(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수 있다. 그 결과가 일본 도쿄전력 원전 오염수 방류를 우려하는 시민들을 “1 더하기 1은 100이라는 사람들”로 몰아가는 이분법이다. 김 부의장은 “지금까지 이런 지도자를 만난 적 없다”고도 했다.
지난 칼럼에서 불완전한 대의민주주의는 자칫 권력의 독주를 낳을 수 있다고도 했다. 만약 국민의 위임을 받은 권력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어떻게 될까.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국민 모두가 주권을 행사하면 무정부 상태”라고 했다. 윤석열 정권 요직에 포진한 대표적 뉴라이트 인사인 그가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건 다 계획이 있어서일 것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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