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옥수수수염차
수십 쪽짜리 쌈박한 논문도 시(詩) 한 편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이에 기대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시루떡 같은 그 짧은 시도 쫄깃한 한 줄의 속담 앞에선 꼼짝마라다. 보름달만큼 잘 빚은 속담 두 개를 꼽아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이보다 더 어떻게 설명하리오. 숱한 세계문학전집의 한 주제이기도 하듯 그 관계가 참으로 오묘하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서로 잘 알아서 낯설고 너무 가까워서 어긋나기도 쉽다. 그 아픔을 달래기라도 하듯 이런 속담은 또 어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이럴 때 촉촉한 눈으로 들어오는 건 대들보가 아니라 엉금엉금 기는 손자.
글쎄, 우리 손녀가 돌잡이를 하는데 판사봉을 잡았다 아이가. 친구는 못 이룬 꿈의 격세실현에 한 발짝 가까이 간 듯 조금 흥분한 눈치였다. 요즘 돌잔치는 예전하고 많이 다르다. 돌잡이만 하더라도 우리 땐 백설기 옆에 대개 연필, 돈, 실이 고작이었다. 요즘의 품목은 청진기, 연필, 돈, 공, 실, 마이크 등등이라고 한다. 시대의 욕망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그 물건들이 뜻하는 바는 굳이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찬물로 빗어넘긴 쪽진 머리,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 품에 안겨 그곳까지 자랑스레 내놓고 찍은 첫돌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돌잔치는 했던가 보다. 나는 그날 무엇을 잡았을까. 물어볼 어머니는 이제 안 계시고, 지금까지 살아 있고 지금 하는 업(業)으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실반 연필반이었을까.
그제는 어떤 강연에 갔다. 입구에 가벼운 과자와 함께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다. 일회용 봉지 커피가 검은 괴한 같다면 종이 포장의 차는 허술하나마 격식을 차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 오늘은 이왕이면 건강도 생각해서 할아버지의 충고가 떠오르는 차를 마시자.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고혈압, 피부미용, 비만에 좋다는 옥수수수염차. 포장을 벗기면 흰 실에 매달린 티백이 대롱대롱 따라나온다. 물에 빠진 보따리 같은 수염차를 건져놓고 보니, 나의 젖은 일생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 같군.
돌잔치에도 등장했던 실타래가 어느새 겨우 한 뼘만큼 짧아졌네. 어제 읽던 책에 걸쳐둔 책끈 같은 그 실이 오늘따라 몹시도 따끔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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