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오펜하이머’에 답하는 일본영화
“B-29를 본 건 열 살 때였지. 방공호에서 나와 보니 히로시마는 사라졌더군. 핵폭풍의 뜨거운 열기가 비를 몰고 왔다. 검은 비였어. 너희 미국놈들은 검은 비를 만들고 네놈들의 가치(돈)를 우리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잊어버렸다. 사토 같은 악마들을 만든 것도 너희들이다. 갚아 줄 때가 되었다.”
잔인하고 무도한 젊은 야쿠자들이 득세하는 원인을 원폭에서 찾은 야쿠자 두목의 음울한 원망과 경고다. 1989년 도쿄영화제에 출품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레인>은 위조 달러를 제조하는 야쿠자를 추적하는 형사액션물이다. <철도원>으로 친숙한 다카쿠라 겐과 마이클 더글러스의 연기 대결과 암투병 중에 젊은 야쿠자 사토 역을 맡아 열연하고 요절한 마쓰다 유사쿠에 대한 추모로 일본에서 화제였던 영화다.
‘블랙 레인’은 원자탄 폭발 시 발생한 열기로 증발되었던 수분에 방사능 분진이 섞여 내리는 검게 오염된 비를 뜻한다. <블랙 레인>은 ‘의리 없는’ 전쟁에 대한 반성과는 거의 무관한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이지만 위 대사는 인상적이었다. 내게 방사능 낙진비의 이미지를 고착시켜준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원폭의 잔혹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영화가 같은 해, 같은 제목으로 개봉했다. <검은 비>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묵시록적 비전을 담은 엘레지다. 주인공 시즈마 부부와 조카딸 야스코를 중심으로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과 피폭자들의 비극을 다양한 각도로 입체화해 섬뜩한 긴장 끝에 눈물이 맺히는 영화다.
<검은 비>를 지배하는 시간대는 방사능에 오염된 비를 맞은 사람들의 5년 후 삶에 집중돼 있다. 생존자들은 끔찍한 기억과 엄습할 죽음 사이에 결박된 채 불안을 온몸으로 밀어내며 살고 있다. 피폭자들이 하나둘 급사하자 시즈마는 조카딸 야스코의 혼사를 서두른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히로시마 피폭자를 꺼리는 탓에 신랑을 찾기 어렵다. 시즈마는 공포에 잠식돼 사이비 종교에 매달리는 아내를 나무라지만 아내마저 곧 죽는다. 이후 영화는 피폭의 영향을 임상실험하듯 야스코의 신체 변화를 묵묵히 기록한다. 뭉텅이로 빠진 머리카락을 망연히 바라보는 야스코의 얼굴에서 검은 비를 맞던 5년 전 순진한 소녀가 겹친다.
태평양 전쟁의 애환을 담은 일본영화를 볼 때면 심정이 복잡해진다. 극중 인물의 고초와 역경이 자아낸 비극에 후련하게 연민할 수 없다. 인물에 동화되려는 순간 일본인들에게 핍박당한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끼어든다. <검은 비>의 비극 속에서도 징용돼 원폭으로 사망했거나 피폭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 조선인들 원혼이 어른거린다.
나치 독일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제조되었던 원자탄이 항복 직전의 일본에 사용된 것은 불행이었다. 트루먼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오펜하이머>에서 재연된 ‘어쩔 수 없는 결정’의 무참한 결과를 일본인들은 30여년 전에 <검은 비>로 고발하고 성찰했다.
<검은 비>의 성찰은 허무하다. 일본이 핵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과학을 들먹이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장시간 홍보했다. 돈을 아끼려는 술책을 감추기 위한 뻔뻔한 변명은 잊고 있던 일본인들의 별명을 떠올리게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인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 패전국의 고통과 수모를 경제전쟁에서의 승리로 치유하고 만회하기 위해 닥치고 돈을 벌었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인들의 이런 특성을 비꼬며 붙여진 멸칭이 ‘경제적 동물’이었다. 이번 만행으로 일본은 ‘경제적 야수’란 불명예를 오랜 시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학 중인 윤석열 정권은 오늘도 이념전쟁으로 여념이 없다.
서정일 영화 칼럼니스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훼손 시신’ 북한강 유기범은 ‘양광준’···경찰, 신상정보 공개
- [속보]‘뺑소니’ 김호중, 1심서 징역 2년6개월 선고···“죄책감 가졌나 의문”
- 안철수 “한동훈 특검 일언반구가 없어···입장 밝혀야”
- [단독] 법률전문가들, ‘윤 대통령 의혹 불기소’ 유엔에 긴급개입 요청
- 트럼프, CIA 국장에 ‘충성파’ 존 랫클리프 전 DNI 국장 발탁
- [영상]“유성 아니다”…스타링크 위성 추정 물체 추락에 ‘웅성웅성’
- 가장 ‘작은 아기’가 쓴 가장 ‘큰 기적’…지난 4월 ‘국내 최소’ 260g으로 태어난 ‘예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