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차벽 트럭

차준철 기자 2023. 9. 1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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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명박산성’이다. 2003년부터 집회·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버스를 줄이어 쌓는 차벽이 등장했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당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세워진 명박산성의 위세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굳이 따지면, 차로 만든 벽은 아니었다. 하룻밤 새 4t 컨테이너 60여개를 이어붙여 2층으로 쌓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바닥에는 철심을 박아 고정하고 바깥벽에는 기름을 칠해 미끄럽게 만들었다. 경찰이 물대포로 무장하고 사수한 이 장벽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 소통을 거부한 불통의 상징이자 압제 시대의 유물로 각인됐다.

명박산성으로 국제 망신을 샀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 때 불법 시위를 막겠다며 다시 서울광장을 차벽으로 에워쌌다. 시민단체의 헌법소원이 제기됐고, 헌법재판소는 2011년 차벽 설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시민들의 행동자유권 침해가 과도하다는 이유였다. 경찰의 원천봉쇄식 집회 금지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러나 차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집회 등에서 차벽을 종종 활용했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 보수단체 집회 때 코로나19 방역을 앞세워 차벽을 동원했다.

차벽 설치는 집회·시위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 5년 전 경찰이 차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최후 수단으로 쓰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회 참가자 안전을 보장할 수 없거나 폭력 행위 제지가 곤란할 때만 예외로 둔다는 게 원칙이다.

경찰청이 내년에 차벽 트럭 4대를 10년 만에 새로 사고 ‘차세대 차벽’으로 불리는 이동형 안전펜스를 구입하는 등 관련 예산 17억원을 확보했다고 한다. 용산 경비와 집회·시위 인파 관리에 필요하다는 이유다. 경비·경호 예산이 증액된 만큼 수사·치안 예산은 줄었다. 강력 사건이 빈발하는데, 집회 봉쇄가 민생 치안보다 우선이라는 것인가. 정부의 집회 강경 대응 기조에 따른 것이라 해도 우선순위가 잘못됐다. 차벽 장비를 늘린 건 집회 현장에 차벽부터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구시대 불통의 상징인 차벽이 도처에 나타난다니 씁쓸하고 끔찍하다.

경찰관들이 2009년 서울 미근동 경찰청 마당에서 열린 ‘차벽 트럭’ 시연 행사에서 트럭 위에 올라 물대포를 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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