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일찍 접을 줄 알았던 무용… 도전이란 일념으로 `그랑 제떼`

2023. 9. 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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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떠나
영국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로
첫 무대 '네 개의 마지막 노래'
현대무용 더해 새 방향성 제시
다큐멘터리 영화 댄싱 피나 (c) mindjazz
이상은
조지 발란신 교향곡 in C (c) Ian Whalen
윌리엄 포사이스 바흐 (c) stepehn wright
드레스덴 젬퍼 오퍼 빈사의 백조 (c) Ian Whalen
윌리엄 포사이스 세컨드 디테일 (c) Jubal battisti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발레리나 이상은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무용수 생활을 시작한 스물다섯살 때, 독일에서의 춤 생활은 '젊을 때 활동하고, 일찍 무용을 그만두겠다'던 20대의 이상은을 바꿔버렸다. 춤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고민하자 새로운 눈이 떠졌던 것. 놀라운 성장의 이 경험은, 지금의 그를 영국 무대 도전으로 이끌었다.

2010년, 독일 드레스덴 젬퍼 오퍼 발레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수석무용수 자리까지 올랐던 그는 최근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 9월, 이상은은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 오른다.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 수석무용수로서의 첫 무대다.◇여유로운 드레스덴의 미소

이상은을 만난 건, 지난 여름 드레스덴에서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 젬퍼 오퍼로 향하는 길. 극장 정면에 서서 왼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유럽의 손꼽히는 바로크 건축물, 츠빙거 궁전의 입구다. 오른쪽으로는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아우구스투스 다리.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로 애칭한 장관이 펼쳐진다. 그 사이 젬퍼 오퍼 극장도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장식들은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생긴 검은 그을림을 훈장처럼 지니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도시가 가진 예술의 품격은 한층 더 성숙하고 여유로운 것 같았다.

극장을 지나 연습실 입구, 이상은은 두 명의 한국인 단원과 함께 기자를 맞았다. 올해 새롭게 발레단에 입단한 이들이었다. 잠깐 사이에라도 후배들을 소개하는 그 미소가, 여유로운 드레스덴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도시가 참 조용하면서도 매력적인 것 같아요.

"드레스덴 생활은 저도 무척 만족해요. 극장을 나와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살며 매일 리허설과 공연을 위해 출퇴근하죠. 거주하기에는 참 좋은 동네예요(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 고즈넉한 동네를 떠나, 대도시 한복판인 런던으로의 이사라니! 영국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제 삶이 좀 시끄러워지겠죠?(웃음) 젬퍼 오퍼 발레를 이끌던 단장(에런 왓킨)이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의 예술 감독으로 부임하며 함께 옮기게 되었어요. 그곳의 수석을 제안받은 거죠.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을 텐데요.

"맞아요. 어떻게 의견을 내야 하는지, 어떤 것들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이제는 드레스덴에서 제일 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것이 좋은 선택일지, 아닐지도 모르죠.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요,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가 일찍 데뷔하고, 무용을 금방 그만둘 줄 알았어요. 신체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막상 활동하면서 얼마나 배울 게 많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도전을 위한 좋은 기회가 생겨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번의 손짓에 담는 무게

2005년, 이상은은 선화예고를 졸업하자마자 대학도 거치지 않고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다. 발레단 경력이 5년 정도 되자 할 수 있는 작품이 한정적으로 느껴졌다. 독립해 외국 생활하는 것은 원래 가진 꿈이었고, 드레스덴에서는 180cm를 넘는 자신의 키가 개성이 될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는 '만약 안 되면 발레는 이제 그만두고 대학 가서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도전했고, 합격했다.

유럽에 있으며 배운 것 중 하나는, 발레 자체를 바라보는 시야였다. 춤에 접근하는 방식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새로운 길이 열렸다. 춤의 가능성은 커졌다. '살아있는 전설' 같던 안무가들의 작품에 오른 것도 중요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고전 발레는 '백조의 호수'를 제일 많이 한 것 같아요. 모던 발레 중에선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을 맡기도 했고요. 그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했다고 느낀 작품은 피나 바우슈의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아'였어요."

-피나 바우슈의 작품 연습 과정은 지난해 다큐멘터리 영화 '댄싱 피나'로 공개되기도 했어요.

"그의 작품이 다음 세대들에게 어떻게 전수되는지의 과정을 담는 다큐멘터리였죠. 그와 함께 작업을 경험한 이들이 전해주는 과정이 무적 상세하게 나옵니다. 보기엔 단순한 스텝 한 번을 밟는데도 굉장히 힘들다고 해야 할까요. 피나 바우슈가 원했던 건 '인텐션'이에요. 그냥 동작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왜 그 동작을 하는지를 무용수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를 가지고 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거죠. 관객들은 항상 무대 위 모습만 보니까, 어떻게 사람으로서, 무용수로서 발전하는지 장면이 담긴 것도 좋더라고요. 보시면, 제가 고생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웃음)"-고생하는 무용수의 삶…. 추천할 만한가요?

"본인이 하고 싶다면? 내적 동기가 중요하고, 그게 만족감을 줄 테니까요."

-그런데 예술이란 아무리 해도 만족이란 게 없지 않나요.

"맞아요. 그래도 제가 좀 편안해지기 시작했던 건, 비교를 덜 하면서인 것 같아요. 타인과 나를요. 물론 아예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한 일이 쌓이고 쌓여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좀 행복해지기도 하고요. 지금은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과 편안함 그 사이의 균형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노련한 경력직 신입의 포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는 로열 오페라 발레와 함께 영국의 손꼽히는 발레단이다. 2012년부터 예술감독으로 발레단 개혁을 거듭해 온 타마라 로호(1974~)의 방향성이 지금의 현주소를 만들었다. 기존의 발레 안무에 있는 남성적 시선의 '포르노적 관점'을 언급하며 개선의 화두로 삼은 것도 로호다. '지젤'의 배경을 공장으로 옮겨와 난민의 시각으로 조명한 아크람 칸의 작품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들이 자주 오르는 새들러스 웰스 극장 또한 영국 현대무용의 중심지로 이미지를 굳혔다. 국내에 들어오는 다수의 참신한 현대무용 작품은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라인업과 유사하다. 고전 발레는 물론, '춤'이라는 지붕 아래 펼쳐질 새로운 움직임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지는 이유다.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 소속으로 처음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안무가 데이비드 도슨(1972~)이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로 만든 신작입니다.

"데이비드 도슨의 작품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어요.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사계'에 얹은 네오 클래식 작품이었죠.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가끔 현대무용과 모던 발레는 그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발레를 유용한 무용 언어로 쓰는 지점이 재밌는 것 같아요. 발레가 가진 테크닉이 그들에게 특별함으로 다가가는 거죠. 어느 정도의 형식으로 서로 이용되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

-현대무용에서 발레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데에는 동의가 되지만, '발레에게도' 현대 무용이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는 컨템퍼러리 경향의 작품에 참여한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발레는 '앞면'만을 보여주는 무용이잖아요. 그런데 현대무용은 뒷면, 옆면을 모두 보여주니까 새롭더라고요."

-마치 2차원만 존재하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로 넘어간 듯한 느낌이군요!

"실제로 그게 발레 테크닉 향상에도 영향을 미쳤고요. 발레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혁신이었잖아요. 현대무용의 접근 방식을 익혔을 때, 발레에서도 정통적인 해석 외에 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지점들, 접근 방식을 많이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에서 선보일 다양한 공연들이 더욱 기대됩니다.

"예술감독 에런 왓킨 또한, 현대무용과 발레의 경계 나누기보다는, 두 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접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에서는 모던 발레뿐 아니라 고전 발레 무대에도 부지런히 오르게 될 겁니다. 무용수 스스로가 예술가로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언제나 적용돼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면서, 춤추는 사람으로서의 방향은 더욱 확장될 거라 기대해요."글=월간객석 허서현 기자

사진=드레스덴 젬퍼 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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