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무타구치 렌야의 유언

박태준 기자 2023. 9. 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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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서울경제TV 보도본부장
2차 세계대전 일본군 최악의 전투
’임팔작전‘ 밀어 붙인 무다구치 렌야
임종 때도 “책임 없다”는 유언 남겨
팬덤에 기댄 보스형 정치 지도자들
훗날 진정한 리더로 생애 정리하길
[서울경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44년 2월 일본 군부는 버마(현 미얀마) 국경 지역 메이묘에서 아라칸산맥을 넘어 인도 동북부의 요충지 임팔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팔 작전’은 병참 보급 문제로 장교들도 실행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작전의 총책임자인 제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이렇게 말하며 참모들을 밀어붙였다.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다. 이만큼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3월 8일 10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친드윈강을 건너 아라칸산맥의 밀림으로 진군한다. 우려대로 강을 건너는 중에 트럭 대신 물자를 날랐던 소와 말들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보급이 끊긴 병사들은 한 달여 만에 밀림에서 굶주림·말라리아와 사투를 벌인다. 1991년 방송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가 뱀을 산 채로 뜯어 먹던, 그 장면이 바로 ‘임팔 작전’이었다.

전투에 함께하지 않고 메이묘에 편안히 남아 있다 뒤늦게 패색이 짙어짐을 확인한 무타구치가 상관 가와베 마사카즈에게 작전 중지를 요청한 것이 출전 넉 달 만인 7월 3일. 그리고 돌아온 병사는 1만 20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지나간 퇴각로는 ‘백골가도’라 부를 정도로 무수한 시체와 해골이 널브러져 있었다.” (권성욱, ‘별들의 흑역사’)

“할복해 폐하와 죽은 장병들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하는 무타구치에게 정보 참모 소좌 후지와라 이와이치가 “마음 놓고 할복하셔도 된다. 이번 작전 실패는 그럴 만하다”고 권하자 그는 두 번 다시 죽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타구치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 출신으로 요직을 거쳤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군인이었다. 무능했지만 허세는 넘쳤던 그에게 맡겨진 탓에 ‘임팔 작전’은 철저히 실패했고 여전히 일본군의 수치로 기억된다. 그리고 무타구치 자신은 ‘조직을 망치는 리더’의 전형으로 관련 강연이나 교재의 단골 소재로 쓰인다. 아니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리더’조차 될 수 없다. 그는 “보스는 ‘가라’고 말하지만 리더는 ‘가자’라고 말한다”고 비교했다. (존 맥스웰, ‘리더십 불변의 법칙’)

2023년 대한민국, 우리는 어떤 리더를 마주하고 있는가. 거대 야당 대표의 단식이 보름을 넘었다. 단식이란 원래 ‘목숨을 건’ 투쟁인 만큼 모두가 공감할 대의와 명분이 있어야 하나 국민은 물론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느닷없는 단식에 갸웃거리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염려스러운 건강과는 별개로 ‘생존과 방탄용’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따라붙는 이유다. 그럼에도 호위 무사들과 팬덤 덕에 그의 자리는 더욱 공고해진다.

대통령은 변함없이 보스의 기질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자유 사회를 교란하는 심리전을 편다”는 대통령의 말은 이념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홍범도 장군이 왜 공산당과 빨치산이 돼버렸는지 역시 국민은 물론 국민의힘 내에서도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통령은 또 장관들에게 “주저하지 말고 싸우라”고 했고 적합한 인사들을 새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그렇게 보스의 “가라”는 한마디에 진영의 행동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갈등과 분열의 밀림 속으로 진군한다. 민생과 번영, 상식과 공정은 잊힌다. 다음 총선이 7개월여밖에 남지 않았다.

패전 후 무타구치는 전범으로 기소됐지만 1년 6개월 만에 석방돼 77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눈을 감기 전 ‘임팔 작전’ 실패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내용의 안내장을 만들어 조문객들에게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난주 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검찰에 출석하며 던진 한마디 ‘화무십일홍’은 대통령은 물론이고 야당 대표 역시 명심해야 하는 고사다. 붉었던 꽃이 떨어지고 자신의 생애를 정리할 무렵, 이 시대의 리더였음을 자임할 그들은 어떤 유언을 남길까. 부디 무타구치의 뻔뻔함과 같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무언가를 바로잡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박태준 기자 ju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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