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성전’이라 했나…러시아의 의도적 오역?

박은하 기자 2023. 9. 1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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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투쟁’ ‘거악의 처단’
러 통역·자국 매체들이 사용
서방 언론들, 표현 그대로 인용
전문가 “대내적 선전” 분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옹호하면서 ‘성전’이라고 표현했다고 주요 외신들이 보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사용하지 않은 성전이란 표현이 등장한 이유는 뭘까.

로이터통신은 이날 김 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만찬에서 “러시아군과 국민은 패권을 주장하고 팽창주의적 환상을 부채질하는 거대한 악의 처단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큰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러시아가 서방과 ‘성스러운 싸움’(sacred fight)을 벌이고 있다고 김 위원장이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생중계 영상을 보면 김 위원장은 이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만찬에서 “영웅적인 러시아 군대와 인민이 승리의 전통을 빛나게 계승해서 군사작전과 강국 건설의 두 전선에서 고귀한 존엄과 명예를 힘있게 떨치리라고 굳게 믿는다”고 표현했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는 “러시아가 패권주의 세력에 맞서 자기 주권적 권리와 안전,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의 위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에 ‘성스러운 전쟁’ ‘거악의 처단’이라는 종교적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성전 등의 표현은 러시아 측의 통역과 러시아 매체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 측 통역은 김 위원장의 모두발언을 전하면서 ‘정의의 위업’을 성전(священная борьба)이라 통역했다. 타스·스푸트니크통신 등 러시아 영문 매체도 성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타스통신은 만찬 발언을 보도하며 김 위원장의 발언에는 없는 ‘거대한 악과의 싸움’ 등의 표현을 집어넣었다. 로이터통신 등 대부분의 서방 외신은 타스통신의 보도를 따랐다. AP통신, 미 NPR 등은 ‘정의로운 싸움’(just fight)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전이란 종교색 짙은 단어가 선택된 것에는 러시아가 대내 선전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러시아정교회 수장인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을 성전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정재원 국민대 러시아·유라시아 학과 교수는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성스럽고 순결한 정교회 민족 러시아’와 ‘기독교 정신을 버리고 동성애를 전파해 인류를 퇴폐와 타락으로 이끄는 서구라는 악마’와의 대결이라는 의미를 늘 강조해왔다”며 “(김 위원장의) 원 발언에 없는 종교적 표현을 끼워 넣은 이유는 평소 강조하던 대내적 선전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영문번역가 노승영씨는 “번역된 낱말은 독자의 머릿속과 사회에 확립된 어휘 연결망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만 옮긴다고 해서 옳은 번역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전했다. 러시아나 영어권에서 정의로운 싸움이 곧 성전이라고 통용된다면 꼭 오역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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