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8.양평 잔아박물관
초가을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북한강 물빛이 검푸르다. 강 너머로 수종사를 품은 운길산이 우뚝하다. 두물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문학의 쓸모와 매력을 전달하는 잔아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 산책로를 걷다가 마주친 모자를 쓴 소녀와 잔디밭에 앉은 다섯 아이의 표정이 해바라기처럼 환하다. 흙으로 빚은 조각 작품들이지만 마치 살아서 말을 거는 듯하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아동문학까지 문학의 전모를 보여주는 잔아박물관(관장 김용만)은 1996년 5월 개관한 1종 전문박물관이다. 마지막 아이를 뜻하는 ‘잔아’는 설립자인 김용만 관장의 필명이다.
■ 꿈을 되찾고 가꾸는 공간
“잔아박물관은 어른들에게는 잃어버린 젊은 날의 꿈을 되찾아주고 학생들에게는 높은 이상과 지성의 정신을 길러주는 학습의 장입니다. 문학은 시나 소설 창작 말고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사업을 하는 데도 꼭 필요한 정서적인 기본 양식입니다. 세상 사는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보다도 신비나 환상 같은 감성적 느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소설 창작과 글쓰기 강의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용만 관장이 들려주는 말이다. 문학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노 작가의 신념은 역동적이다. 테라코타를 활용해 문학을 입체적으로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발상이 참신하다.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 관람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비결이 여기에 있을 듯싶다.
“잔아박물관은 특히 어린이들의 관람을 환영합니다. 유치원생이라도 한글만 읽을 줄 알면 그들에게 톨스토이, 세르반테스, 카프카, 괴테, 헤밍웨이,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들을 소개합니다. 이분들의 이름만 기억하게 해도 어린 영혼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이나 문자메시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세계, 우주와 영원과 진리 같은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잔아박물관을 ‘글과 흙의 놀이터’라고 부르는 까닭이 궁금하다. “이곳이 문학과 테라코타가 어우러진 세계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글은 인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언어라고 볼 수 있지요.” 글이 김용만 작가를 상징한다면 흙은 테라코타로 문인들의 흉상을 제작하는 여순희 작가를 상징한다. 잔아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부부가 합심해 글과 흙으로 빚어내는 문학과 예술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 한국의 유명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다
테라코타를 활용한 전시실은 입체적이다. 전시실 구석이나 모퉁이에서도 뜻밖의 재미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성실하게 꾸몄다. 느긋하게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흉상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세르반테스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대표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그 앞에 놓인 세르반테스의 흉상과 작은 액자를 살펴본다. 작은 사진 액자는 세르반테스를 찾아 떠난 문학기행 때의 김 관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세르반테스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늦깎이로 등단한 김 관장의 본보기가 아닐까.
김남조, 신경림, 정호승을 비롯한 유명 시인의 친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신달자 시인이 2014년 7월 남긴 글을 소리내어 읽어 본다. “비가 오거나 햇살이 나거나 하는 날 잔아문학박물관에 왔네. 내 문학 속의 핏불이 아우성치네. 그리운 문인들이 와 가슴속으로 오시네.” 수첩과 증명서 같은 작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도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한 문학도가 걸어온 삶의 오롯한 흔적이다.
흙으로 빚은 물고기를 들고 웃고 선 함민복 시인 곁에 서 있는 여순희 작가의 모습도 푸근하게 다가온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 한 편의 수필만큼 풍부한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오적’으로 권력층의 부패를 고발한 고 김지하 시인의 친필 원고가 있는 옆에 구약성서를 번역하면서 시인이 된 문익환 목사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는 글과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글씨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1960년대 초반 혜성처럼 문단에 등단한 ‘무진기행’의 소설가 김승옥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김 관장이 사귄 시인과 잔아박물관을 찾은 작가들이 무척 많았던 사실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표지는 낡았지만, 문학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희귀본 소설책과 시집도 여러 권이 전시돼 있다. 여순희 작가가 빚은 문인들의 테라코타 흉상의 부드러운 선은 따스한 색을 만나 깊고 그윽하다. 한 작가의 삶과 개성이 잘 표현된 상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까. 작가들의 흉상 앞에서 대표작품을 떠올려본다.
■ 책은 만져만 봐도 반은 읽은 셈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굴곡진 생애도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의학을 공부하다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아Q정전’을 지은 루쉰, 동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과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 같은 대가들의 흉상 앞에서 박물관 관계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고 심어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 푸시킨,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헤밍웨이, 카프카, 빅토르 위고, 존 스타인벡,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등 세계 문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강아지 똥’의 권정생 작가를 비롯해 아이들에게 듬뿍 사랑받는 아동 문학가들을 만나는 공간에 들어선다. 동화책 속 익숙한 이야기 장면들이 벽화로 재미나게 꾸며져 있다. 테라코타로 한국 전래동화 속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재현한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책장에서 동화책을 꺼내 펼치도록 만드는 마력이 느껴진다. 문인들의 테라코타 흉상이 가득 놓인 방안에 들어선다. 세계적 문호들과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낯익은 얼굴이다. 황순원, 서정주 같은 작고 작가들은 물론 소설가 김연수, 시인 문태준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의 얼굴도 여럿 보여 반갑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책으로 탄생한 작가의 원고를 살펴본다. 작가의 묵은 원고에서 문학의 생명력을 체험한다. 작가의 친필 원고와 작가들이 어울린 한 장의 흑백사진, 작가의 흉상 테라코타는 멀어 보이던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심리적인 문턱을 낮추어 준다.
■ 소통과 공감의 열린 공간
오는 24일 ‘잔아박물관 가을 시낭송회’가 열린다. 올해의 초청 시인은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오세영 시인이다. 2012년 장석남 시인을 시작으로 정호승, 문태준, 문효치, 도종환, 김남조, 신달자, 함민복, 안도현, 나희덕 시인과 함께했다. 올해로 11회째를 맞은 잔아박물관 가을 시낭송회는 양평지역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낭송자 10여 명의 애송시 및 창작시를 낭송하고 색소폰 연주와 성악공연, 클래식 기타 합주 같은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박물관 야외 잔디정원은 빛과 소리가 어울리는 축제마당으로 변모한다.
잔아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은 최상급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지원사업에 올해 9년째 연속으로 선정된 것은 잔아박물관의 저력을 보여준다. ‘나는?너는?누구?’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길 위의 인문학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박물관 관람과 강연, 체험 교육이 11월까지 진행된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소현 학예사의 바람을 들어본다. “감정표현과 자아 성찰의 어려움을 함께 이해해보는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올바른 인간관계 형성과 긍정적 감정표현,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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