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서 제의받은 병자 역할…전무송 “이거 하고 죽자 각오했죠”
“건강 잘 추스려 공연 완성. 공연 때까지 어떠한 프로그램도 맡지 않고 연습에 전념. 일생에 마지막 기회.” 대본 맨 뒷장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배우 전무송(82)이 볼펜으로 쓴 육필. 낡고 닳은 대본엔 빨간 펜, 형광펜, 연필로 쓴 밑줄과 메모들이 빼곡했다.
19일 개막하는 연극 ‘더 파더’는 치매 앓는 80살 아버지와 간병하는 딸의 분투를 다룬다. 뒤틀리는 시간, 흔들리는 기억 속에 착각과 망각이 교차하는 현실은 짙은 안갯속이다. 연극은 모든 게 어리둥절한 아버지 내면의 혼란스러운 시점으로 흘러간다. 뻔할 수도 있는 치매 가족 이야기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건물 3층 연습실. 딸은 아버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거린다. 구부정한 어깨에 안경을 콧등에 매단 아버지는 당혹스러운 표정. 실제 부녀 관계인 전무송과 딸 전현아(52)가 아버지 앙드레와 딸 안느를 연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극 중 부녀로 하는 연기는 두 번째인데, 2003년 ‘당신, 안녕’(윤대성 작) 이후 20년 만이다. 아버지는 연기 경력이 60년을 웃돌고,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딸도 30년째 연극과 드라마에 출연해 왔다. 이 작품 끝나면 영화에도 부녀가 함께 출연한다.
전무송은 “이 연극 하고 죽으련다”며 웃었다. 올해 초 그는 크게 아파 보름 남짓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4월 퇴원해 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더 파더’ 대본이 도착했다. “읽어보니 안 할 수 없겠더군요. 주인공이 또 병자예요. 마침 잘 됐다, 그럼 이거 하고 죽자, 각오했지요.” 그는 “‘이제 끝나나 보다, 무대에 더는 못 서겠구나’ 하고 절망적이었는데 대본을 보니 ‘왜 쓰러져.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며 “처음엔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연습할수록 운명처럼 기력이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더 파더’는 프랑스 극작가이자 영화감독 플로리앙 젤레르가 2012년 발표한 작품. 그의 가족 3부작(‘아버지’, ‘어머니’, ‘아들’)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몰리에르상,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 미국 토니상 등 권위 있는 공연상을 휩쓸었다. 젤레르가 직접 각색·연출해 주연 배우 앤서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2020년 영화 ‘더 파더’의 원작이다. 2016년 국립극단이 ‘아버지’란 제목으로 (박정희 연출·박근형 주연)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이번엔 ‘스튜디오 반’ 제작에 이강선이 연출을 맡았다.
“이전에 아버지와 딸로 연기할 땐 짧은 분량이라 부담이 없었는데 이번엔 아버지를 끝까지 돌보는 딸 역할이라 어려워요.” 전현아는 “처음엔 아버지 비서가 필요해 나를 불렀나 했는데, 대본을 보니까 막중한 역할이더라”며 웃었다. 고역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 “연극에선 딸 안느가 강인하고 꼿꼿하게 힘을 내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병상에서 고생하신 아버지를 쭉 지켜봐서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연습 초반 극적인 장면에서 몇 차례 울음이 터지자 이강선 연출이 “안느는 울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부모와 한집에 사는 전현아는 연습실을 오갈 때마다 아버지의 운전기사도 겸한다.
전현아는 ‘앙드레’를 “하나씩 지워지는 기억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존엄한 인간으로 가려고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치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 이야기가 아니에요. 딸과 아버지, 가족 간의 회복과 용서, 화합에 관한 작품이더군요.” 전무송이 덧붙였다. “치매를 안 겪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모르죠. 치매를 희로애락이 이는 인생의 연장선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작품 속과 실제 부녀 관계에 닮은 점이 있을까. 전현아가 “딸이 아버지를 극진히 생각하는 게 닮았다”고 하자, 전무송은 “그건 아니지, 맨날 연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야단치지 않느냐”며 웃었다. “극 중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딸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지 않는데 실제 우리 아버지는 딸 바보예요. 너무 자상하시죠.” (전현아) “그래, 그건 인정한다. 얘 시집갈 때 내가 한 3일 울었지요.” (전무송) 전무송의 사위 김진만(54)과 아들 전진우(48), 며느리 김미림(38) 모두 연기를 하는 ‘연기자 가족’이다.
공연은 10월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에스(S)씨어터.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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