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로 8시간, 오지의 섬·섬·섬… 바다 위 ‘트레킹 길’로 이어지다[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기자 2023. 9.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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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일기자의 여행 - 다리로 하나된 고군산 열도
방축도서 말도까지 5개 섬
한구간 빼고는 보행교 놓여
징검다리 건너듯 걷는 재미
명도 등은 ‘K-관광 섬’ 선정
트레킹 첫 관문은 출렁다리
물 색만 봐도 ‘먼 바다’ 실감
시루떡같은 해안 절벽 장관
구렁이전설전망대, 뷰 명소
고군산군도의 서쪽 끝 섬에서 동쪽을 바라본 모습. 저 아래 마을이 들어선 섬이 고군산군도의 끝 섬인 말도다. 말도 너머로 보농도와 명도, 광대도, 방축도가 보인다. 이들 섬에는 지금까지 3개의 보행교가 완성됐는데, 내년에 명도와 광대도를 잇는 보행교까지 놓이고 나면, 다섯 개 섬이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군산=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멀고도 먼 섬, 말도(末島)

‘명도·말도 오늘 결항’. 군산 내항의 ‘뜬 다리 부두’ 쪽에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시절. 여객선 첫 배 운항을 앞둔 푸른 새벽이면 매표소 창구 앞에 자주 나붙던 안내 문구였다. ‘끝 말(末)’ 자를 이름으로 쓰는 군산의 말도(末島)는 ‘고군산군도의 끝 섬’이다. 끝 섬 바로 안쪽에는 ‘명도(明島)’가 있다. 고군산군도의 바깥 섬들은 눈썹 모양으로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어 ‘고군산열도’라고도 했는데, 말도와 명도는 열도 서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가장 먼 두 개 섬이었다.

새만금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고군산군도 중심인 선유도까지도 좀처럼 가기 어려웠다. 지금이야 차만 타면 새만금방조제와 연륙교(連陸橋·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 쉽게 닿을 수 있는 육지가 돼버렸지만, 이 섬 저 섬을 들르는 완행여객선이 다니던 시절 선유도는 배 시간만 4시간이 걸리는 ‘멀고 먼’ 섬이었다. 말도와 명도는 거기서 또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으니 ‘낙도(落島) 중의 낙도’였다. 선착장도 변변히 없어 말도나 명도를 가려면 섬 앞에서 ‘새마을호’란 이름의 작은 종선(從船·갈아타는 작은 배)으로 갈아타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 무렵 군산에서 말도까지 배로 자그마치 8시간이 걸렸다. 뱃멀미의 추억과 함께 떠올리는, 자그마치 40년 저쪽의 아득한 기억이다.

개인적인 사연이라 꺼내놓기 좀 뭣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더 해보자. 말도로 이끌었던 건 순전히 젊은 날의 치기 때문이었다. 여행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 가보지 않은 곳의 형편을 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은 우체국이었다. 무작정 군산에 가서 군산우체국을 찾아갔다. 우체국 창구에서 ‘가장 먼 섬’을 물었다. 창구 직원이 고군산군도의 끝 섬, 말도를 말해줬다. 말도보다 훨씬 더 먼 어청도며 상·하왕등도 가는 배가 군산항에서 떴는데도 말도를 권해줬던 건, ‘가장 멀다’는 게 진짜 물리적인 거리가 아님을 우체국 직원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길로 사흘을 기다려 결항 끝에 뜬 여객선을 타고서 말도로 들어가 한 달쯤을 살았다.

# 작은 낙도가 ‘K-섬’이 되다

긴 배 시간에다 뱃멀미까지 감수한다고 해도 말도나 명도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섬이었다. 여객선이 결항을 밥 먹듯 했기 때문이었다. 말도나 명도까지는 운항하는 날보다 결항하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 운항을 하면, 이틀은 결항하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항의 원인이 꼭 바람이나 거친 파도 때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많아 봐야 두어 명쯤 되는 승객을 위해 먼바다까지 나가는 것보다는 아예 결항하는 편이, 운항보조금을 받는 선사 입장에서 훨씬 더 이익이었으리라. 그러니 선사는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서 ‘명도·말도 결항’ 문구를 써 붙였다. 결항 날이면 오지 않는 여객선을 기다리던 말도나 명도 사람들은, 저 멀리 방축도까지만 왔다가 뱃머리를 돌려 가물가물 사라지는 여객선 뒷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말도·명도 항로는 요즘도 단골 결항노선이다. 지난봄에도 바람과 안개로 인한 시계 불량 등의 이유로 여객선은 수시로 결항했다. 말도를 가기 위해 군산에 네 번을 갔다가, 네 번 다 여객선이 결항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먼바다 끝 외딴 섬의 형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외딴 섬 명도와 말도가 상전벽해를 코앞에 두고 있다. 정부가 전국에서 대표적인 5개 섬군(群)을 뽑아 4년에 걸쳐 대단위 투자로 ‘가고 싶은 K-관광 섬’으로 키워보겠다며 나섰는데, 뜻밖에 말도와 명도, 그리고 방축도가 그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생소한 이름의 손바닥만 한 섬이 울릉도, 거문도, 백령도, 흑산도 등 절경의 섬들과 나란히 ‘K-관광 섬’이 돼 나라를 대표하게 된 셈이다.

어디에든 K란 이름을 훈장처럼 달아주다 급기야 낙도의 섬에까지 ‘K’를 가져다 붙여놓은 것이 영 거슬리긴 하지만, 변하지 않았던 끝 섬의 변화가 기대된다. 예나 지금이나 늘 궁벽함을 벗어나지 못했던 먼바다 작은 섬들은, 이제 과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명도와 무인도인 보농도 사이에 놓인 보행교. 보농도로 건너온 뒤에 뒤돌아서 명도를 봤다. 목조 덱과 이어진 다리 너머 섬이 명도다.

# 군산과 고군산 이야기

말도와 명도에 가려면 장자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장자도는 새만금방조제 제방과 연륙교, 연도교(連島橋·섬과 섬을 잇는 다리)로 육지가 된 고군산군도의 섬, 선유도와 이어진 작은 섬이다.

명도나 말도로 건너가기에 앞서서 고군산군도 얘기부터 해보자. 고군산군도에서 ‘고(古)군산’이란 ‘옛 군산’이란 의미다. 지금 ‘군산(群山)’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창구이자 짬뽕이나 이성당 빵집으로 이름난 항구도시의 지명이지만, 군산은 본디 고군산군도 중심의 섬인 선유도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바위로 이뤄진 섬과 섬이 마치 무리 지어 솟은 산처럼 보인다 해서 선유도를 군산도(群山島)라 불렀다. 왜구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던 고려 말·조선 초에 선유도에 수군 기지가 들어섰고, 선유도의 수군 기지를 ‘군산진(群山鎭)’이라 불렀다.

군산진이 들어서자 왜구들은 수군 기지가 있는 선유도를 우회해 내륙을 공격했다. 이런 일이 잦자 조선 세종 때 수군 부대를 지금 진포해양공원이 있는 내륙의 진포로 옮겼다. 수군 부대가 이전하면서 군산진이란 이름까지 짊어지고 갔다. 그러니 어제까지 군산이었던 선유도는, 수군진이 떠나버린 뒤에 고(古)군산, 그러니까 옛 군산이 돼버린 것이다. 고군산이란 이름은, 후에 ‘군도(群島)’라는 덧말이 붙여져 선유도와 인근 섬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 됐다.

무인도를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서 숫자가 달라지긴 하지만, 고군산군도에는 유인도 16개와 무인도 51개가 있다. 고군산군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큰 섬인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등 섬 6개는 새만금방조제 건축과 함께 연륙(連陸)과 연도(連島)로 육지가 됐다. 녹슨 철부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던, 바람이 불거나 안개라도 끼면 잦은 결항으로 무시로 발이 묶였던 찐득한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이제는 차를 타고 들어가는 경쾌한 드라이브코스가 된 것이다.

# 말도에 그린 K-섬의 밑그림

선유도가 육지가 됐다고 해서 고군산군도 전부가 육지가 된 건 아니다. 67개 섬 중 다리로 연결된 건 6개 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아직도 섬이다. 다리가 놓여 섬이 육지가 된다는 건 고립에서 벗어난 섬사람은 물론이고, 들고나는 게 한결 편해진 여행자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섬이 육지가 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먼바다의 섬이 ‘등 푸른 날것’과 같다면, 다리가 놓여 육지가 된 섬은 어쩐지 ‘길들여진 애완용’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지가 된 섬 끝에 서서 다시 바다 너머의 섬을 ‘로망’한다. 그렇게 바라다보이는 곳이 바다 위에 줄지어 늘어서 고군산군도의 끝인 작은 섬, 명도와 말도다.

방축도와 명도, 말도에는 이미 ‘K-관광 섬’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섬에 그려진 밑그림은 ‘바다를 건너는 섬길’이다. 방축도에서 명도와 말도로 건너가는 길이 있다. 섬과 섬을 건너다니며 걸을 수 있도록 보행전용 연도교를 걸어 섬을 건너다니며 트레킹할 수 있게 만든 길이다.

방축도에서 말도까지, 다섯 개의 섬에 걷기 전용인 보행교가 이미 놓였거나, 앞으로 놓일 예정이다. 5개의 섬을 잇는 건 4개의 다리다. 하나로 이어 걸을 수 있게 되는 고군산군도의 섬 이름을 육지에 가까운 곳부터 먼바다 쪽으로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자. 방축도∼광대도(무인도)∼명도∼보농도(무인도)∼말도. 이 중에서 광대도∼명도 구간 보행교만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나머지 구간 3개의 보행교는 이미 완공됐다. 걸어서 방축도∼광대도를, 그리고 명도∼보농도∼말도를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도 여객선 선착장 부근의 습곡. 휘어진 지층이 그려내는 선이 예술작품 같다. 말도의 습곡은 국가지질공원 명소이자 천연기념물이다.

# 다리 두 개를 건너 세 개 섬을 걷다

고군산군도에서 보행교로 연결된 섬 길을 걸어보았다. 명도에서 다리 건너 보농도로, 보농도에서 다리 건너 말도로 건너가는 코스를 택했다. 다리는 진작 완공됐지만, 다리 출입은 아직 통제 중이다. 트레킹 코스와 다리를 연결하는 접속구간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내년쯤에나 공사가 마무리될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데, 기껏 다 놓은 새 다리를 가로막고서 1년을 묵히겠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명도에서 말도까지 걸어 보니 구태여 막아서야 할 정도의 위험구간은 없었다. 명도에서 보농도로 건너가는 보행교로 내려가는 길이 좀 가파르지만, 안전시설을 조금만 보강하면 웬만한 등산로 수준의 난도와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좀 가파르다 싶은 구간에는, 누가 매어 놓았는지 굵은 밧줄도 매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다 만든 다리를 가로막기보다는, 서둘러 안전시설을 다듬어서 건너다니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장자도에서 탄 여객선 ‘섬사랑 3호’는 장자도 코앞의 섬 관리도를 시작으로 고군산군도의 섬인 방축도, 명도, 말도를 차례로 들른다. 고군산군도의 끝 섬들로 가는 뱃길에서 인상적인 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우람한 뒷모습이다. 산정의 바위 봉우리로 이뤄진 섬의 뒤통수가 훨씬 더 기운이 넘쳐 보였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보여주는 기이한 지층이었다. 해안절벽의 단면에는 마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지층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리가 뚜렷했다. 습곡의 형태는 갖가지였다. 지층이 둥글게 휜 곳도 있고, 지층이 아예 세로로 일어서버린 곳도 있다. 지각변동의 엄청난 힘이 섬을 주무르면서 저마다 그려낸 무늬와 그림이다.

# 섬과 섬을 건너가는 재미

여객선 섬사랑 3호가 들르는 고군산군도의 섬 하나하나 얘기를 해보자. 배가 가장 먼저 들르는 관리도(串里島)는 ‘꼬치’를 뜻하는 ‘익힐 관(串)’ 자를 쓴다. 수많은 장군이 활을 쏘아 적의 몸에 꽂았다고 해서 ‘꽂이섬’이라고 불렸다고도 하고, 섬이 꼬챙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꼭지도’라고도 불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적다 보니 관리도가 됐다는 얘기다.

관리도는 섬 전체가 근사한 하나의 완결성 있는 트레킹 코스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는 용바위, 1만 개 불상 형상이라는 만물상 바위, 하늘을 향해 뚫린 천공굴이 있는 쇠코바위 등이 섬의 명물이다. 섬 안의 캠핑장 근처 낙조 전망대에서의 해넘이 풍경도 근사하다. 장자도 코앞에 있어 배 타는 시간도 딱 10분이니 선유도 일대 관광과 엮어서 즐기면 딱 좋다.

이어 배가 닿는 섬이 방축도다. 방축도는 길게 늘어선 열도의 섬 중 가장 크다. 그래 봐야 군도의 다른 섬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방축도도 겨우 50가구 남짓의 자그마한 섬이다. 방축도의 최고 명소는 단연 섬 서쪽 해안의 독립문 바위.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구멍 뚫린 바위다. 고군산군도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문 바위’로 불렸는데, 언제부터인가 ‘독립문 바위’란 더 직관적인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난 6월 지정된 고군산군도 국가지질공원의 대표적인 지질 명소다. 독립문 바위는 방축도에서 내리지 않아도 섬을 들고나는 여객선 위에서 볼 수 있다.

방축도 서쪽에는 손바닥만 한 무인도인 광대도로 건너가는 출렁다리도 있다. 줄지어 늘어선 군도를 한 두름의 길로 꿰는 섬 트레킹 코스의 관문이자 첫 다리인 셈이다. 출렁다리 길이는 83m. 그리 길지 않지만 올라 서면 다리 전체가 크게 출렁여서 제법 건너는 재미가 있다.

고군산군도의 끝 섬인 말도의 서쪽 끝에 서 있는 등대. 일제강점기 바로 전해인 1909년 지어진 작은 등대가 퇴락한 자리에다 1989년 다시 지은 등대다.

# 명도를 딛고 말도로 가는 길

방축도를 들른 여객선은 무인도 광대도를 지나쳐 명도에 닿는다. 명도까지 나가면 서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다가 맑다. 물색만 봐도 여기서부터는 ‘먼바다’라는 게 새삼 느껴진다. 명도에서 보농도를 건너 말도까지 3개 섬을 보행교로 건너서 둘러보기로 했으니, 여기서 내렸다.

명도 마을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관광객에게 숙소 등으로 내어주기도 하는 다목적시설인 ‘명도, 삶문화센터’란 건물이 있는데 그 주변으로 ‘K-관광 섬’의 부푼 기대를 안고 짓는 펜션이 여럿 있다. 어찌 보면 섬마을 절반쯤이 펜션단지가 돼버린 형국인데, 그렇다고 난개발의 느낌은 아니다. 어찌 됐든지, 30가구 남짓 낙도 특유의 적요하고 무기력했던 과거 모습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아 보였다.

명도 마을 뒤쪽으로 능선이 있다. 이 능선으로 걷기 길이 이어지는데, 그 길 위에 두 개의 전망대가 있다. 하나는 서쪽, 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또 하나는 능선의 동쪽 끝에 있다. 서쪽에 있는 게 ‘구렁이전설전망대’고 동쪽에 있는 게 ‘오진여 체험경관전망대’다.

보농도를 딛고 고군산군도 끝 섬인 말도로 건너가겠다면, 서쪽 구렁이전설전망대로 가야 한다. 구렁이전설전망대라니 그럴듯한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오래전에 거기 구렁이가 살았다’는 게 전설의 전부다. 전망대 안내판에는 명도의 전설 얘기는 없고, 구렁이의 생태나 종류 얘기만 잔뜩 써 놓았다.

구렁이전설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잡풀로 무성하다. 우거진 풀로 길이 점점 좁아져서 나중에는 길을 지워버리다시피 했다. 섬 주민들이 펜션을 짓는 노고를 손톱만큼이라도 덜어, 능선길 주변의 풀이라도 좀 베어줬으면 좀 고마웠을까. 이 먼 섬까지 관광객을 불러들이겠다면 펜션을 짓는 것보다 길을 다듬는 게 순서가 아닐까.

# 오래전의 추억을 찾아서

구렁이전설전망대는 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다 만든 목제 덱이다. 전망대는 작은데다 거대한 송전 철탑 바로 옆에 있어 더 작아 보이지만, 거기서 펼쳐지는 경관의 스케일만큼은 장쾌하다. 전망대에서는 섬 서쪽의 보농도와 말도, 그리고 그 섬으로 건너가는 보행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보행교를 건너는 기분이 근사했다. 두 발로 걸어서 바다 건너 다른 섬으로 들어가는 느낌도 그랬고, 보행교 난간에서 뒤돌아 선유도 일대의 섬을 바라보고 서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시간도 좋았다.

명도에서 다리를 건너 닿는 보농도는 무인도다. 섬과 섬을 건너가며 징검다리처럼 딛고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면, 사람의 발길이 닿을 일이 없었던 섬이다. 보농도에서 길은 서어나무가 극상림을 이룬 숲에 놓인 나무 덱 계단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길은 말도로 들어가는 보행 연도교로 이어졌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 말도로 들어간 길은, 마을 뒤편 산자락의 군 기지 쪽으로 연결된다. 목제 덱을 딛고 숲길을 내려가니 길은 이내 작은 섬마을, 말도리(末島里)다. 선착장이며 방파제 모습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사라진 것들이 있던 자리를 겨누며 과거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처음 봤을 때 입을 딱 벌리게 했던 선착장 옆의 습곡지층도 예전 그대로였다.

오래전에 말도로 떠났던 여행이 ‘가장 먼 곳’을 향한 여정이었다면, 다시 말도를 찾아가는 여행이 향하는 목적지는 추억이었다. 내로라하는 관광지가 된 고군산군도의 큰 섬들이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달라져 온 사이에, 먼바다 끝의 섬 말도는 다행히도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스쿠프로 떠낸 듯한 무인도 정상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던 ‘천년송’은 그때보다 여위긴 했지만 여전했고, 말도 등대도 그 오랜 시간을 건너오며 밤바다를 밝히고 있었다.

하필 지금 추억을 찾아 나섰던 건,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곧 상전벽해의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들이 있으리라. 추억의 불씨를 뒤져 볼 수 있는 곳. 잊고 있던 기억을 단번에 떠올리게 하는 곳. 이번 여정의 목적지는 고군산군도의 끝 섬, 말도였지만 진짜 권하고 싶었던 건 저마다의 추억이 깃든 목적지였다. 짐을 꾸려서 가보자. 그곳이 더 달라지기 전에, 그래서 추억마저 잊히기 전에….

■ 섬사랑 3호의 20대 여성 항해사

연안여객선 선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년을 넘긴 남성이다. 그런데 말도 가는 여객선 섬사랑 3호에는 여성 항해사 오은지(23) 씨가 있다. 섬사랑 3호가 유독 낡고 녹슨 배여서 밝게 승객을 대하는 오 항해사가 더 빛이 나는 듯했다. 섬사랑 3호는 건조된 지 올해로 23년째. 선령(船齡)이 오 항해사의 나이와 똑같다. 항해사로 일한 지 3년째지만, 힘에 부칠 때가 많단다. 배에서 만나면 반갑게 격려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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