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능선 특집 사고사례] 준비 부족, 판단 미스,만용 비극 뒤엔 '3가지 화근'
공룡 무서움 알린 사망 사고(1993년)
대구 K대 대학생 4명은 오대산 산행에 나섰으나, 입산통제라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설악산 공룡능선으로 바꿨다. 12월 17일 아침 8시 백담사 방면으로 산행을 시작한 이들은 오세암을 거쳐 오후 2시 마등령에 닿았다. 30년 전 공룡능선은 지금보다 산길이 훨씬 거칠었다. 지금은 계단, 난간, 고정 쇠사슬 로프, 발판 같은 것이 비교적 잘되어 있으나 당시엔 이런 것이 없어 지금보다 훨씬 힘들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다.
1275m봉을 오후 4시에 통과했으나 겨울이었기에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지며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소모된 상태였다. 어두워지면서 체력과 판단력이 떨어진 이들은 길을 헤매게 되었다. 조난당한 것.
와중에 체력이 떨어진 A군의 저체온증이 심각해졌다. "잠이 온다"고 호소하며 주저앉기를 반복한 것. B군은 발을 삐어 통증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두 사람이 억지로 이들을 끌고 나아갔다. 밤 9시, 어둠 속에서 희운각대피소 불빛을 멀리서나마 발견했다. C군이 저체온증 증상이 있는 A군을 데리고 희운각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D군은 B군을 돌보며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구조를 요청하러 간 두 사람은 신선대를 내려가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가야동계곡 방면으로 내려선다. 완전히 방향을 오판해 정반대인 백담사계곡 상류 쪽으로 들어선 것. 당시 그들의 흔적과 생존자 진술에 의하면 어둠 속에서 급경사를 미끄러지고 구르며 내려섰다고 한다. 결국 한계에 이른 A군은 주저앉은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C군에게 "내려가서 구조를 요청해 달라"고 청하게 된다.
C군 홀로 가야동계곡을 따라 내려섰으나 결국 체력이 다해, 배낭의 쌀과 라면을 꺼내 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했다. 혼신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 산을 내려온 C군은 12월 18일 아침 8시,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했다.
당시 대피소 관리인은 "아침밥을 먹는데 총각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쓰러졌다"며 "대피소에 눕혔더니 2시간 뒤에 의식을 회복했고, 일행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구조대가 출동했으나 A군은 가야동계곡 상류에서 동사한 채 발견되었다. 공룡능선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이들은 텐트를 가지고 있었으나 치지 못한 채 플라이를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18일 아침 등산객들에게 발견된 D군의 품에 안긴 B군은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둔 후였다. 4명 중 2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대장의 판단 착오와 저체온증(2003년)
생존자가 쓴 산행기를 옮긴다.
11월 10일 밤 10시 30분, 33명을 태운 안내산악회 버스가 서울을 출발해 설악산으로 향했다. 새벽 3시 비가 오는 가운데 설악동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1진은 천불동으로 공룡능선을 타기로 하고, 2진은 비선대에서 마등령까지만 다녀오기로 하고 나뉘었다. 공룡능선 입구인 무너미고개에 도착하니 아침 8시.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체감온도는 영하 10℃.
하산하겠다고 하니 산악회 대장이 극구 반대한다. 결국 공룡능선에 진입했으나 회원 간 거리가 벌어져, 선두엔 대장 포함 6명, 중간엔 나 포함 7명, 후미엔 나이 드신 분과 후미대장으로 나뉘게 되었다.
비바람과 진눈깨비가 세차게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 공룡능선 종주를 이어갔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2진에서 악천후가 심해 산행을 중지해야 한다는 연락을 하려 했으나 무전 교신이 안 됐다고 한다.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쳤고, 얼굴이 얼어 감각이 없을 정도로 추위가 심했다. 모두들 등산화가 젖어 질퍽거리고, 발이 극도로 시린 걸 참고 걸었다. 비선대에서 도착하니 오후 3시, 해냈다는 기분보다는 오늘 산행은 문제가 있었다.
오후 4시경 비보가 날아왔다. 후미대장과 함께 오던 연세 있는 분이 저체온증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단다. 도움을 요청하려 후미대장이 내려온 것. 119에 구조 요청을 했다. 먼저 내려온 이들 중 누군가는 남은 이들을 도우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 내가 나섰다.
후미대장과 함께 4시 30분경 마등령 방향으로 올랐다. 한 시간을 올랐을 때, 산악회 대장과 일행 한 분이 누워 있었다.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한 채 희미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은 그윽히 편안해 보였다.
가져온 우산 2개로 비를 막고, 온수를 먹이고 팔 다리를 주물렀다. 장비가 말이 아니다. 어떻게 공룡능선을 넘어왔는지, 우의도 없고, 붉은 조끼와 얇은 가을 재킷, 스판 바지가 전부였다. 6시경 구조대가 도착하자마자 환자의 온 몸을 마사지하며 "정신 잃지 마라! 살 수 있다!"고 소리 지른다. 구조대원들이 사력을 다해 마사지 하는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같이 있던 후미대장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더니 실신한다. 저체온증이 온 것 같다. 구조대가 두 패로 나뉘어 두 사람을 주물렀다. 잠시 후 후미대장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조대는 남은 분들을 구조하러 올라 갈 테니 하산하라고 한다. 설악동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 17시간을 눈보라와 비바람 속에서 떨었다. 결국 후미의 어르신은 명을 달리했다.
11월 악천후 하루 2명 목숨 앗아가(2021년)
11월 9일 오후 3시, 공룡능선에서 구조 요청이 왔다. 50대 부부였다. 설악동 기점으로 공룡능선 원점회귀 산행에 나선 부부는 비선대에서 마등령까지 올랐다.
이날 중청대피소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태풍의 최대 풍속에 가까운 18m/s의 강풍이 불었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쏟아졌고,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영하 7.4℃까지 떨어져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국립공원의 체감온도 환산표에 따르면 이날 체감기온은 영하 30℃였다.
마등령까지 올라오는 데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으나 부부는 공룡능선 종주를 시작했고, 결국 악천후에 저체온증 증세가 나타났다. 특히 아내 A씨의 탈진과 저체온 증세가 심각했다. 그러나 이날 악천후로 인해 오색 방면과 공룡능선에서 동시에 119구조 요청이 들어온 상태라 구조 인력을 나누어야 했다.
오후 3시 40분경 대청봉에서 오색으로 이어진 등산로 상에서 B씨가 저체온증으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다.
오후 5시경 공룡능선 중간쯤에서 구조 요청 한 부부를 구조대가 발견했다. 강풍으로 헬기 출동이 불가해 구조대는 응급처치를 하고 업어서 마등령~비선대 방면으로 내려섰으나, 발견 당시 살아 있던 아내 A씨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공룡능선 안전산행법 TOP 5
1 공룡능선은 자랑 위한 수단 아냐
인터넷 SNS에서 자랑과 인증 문화가 유행하면서, '공룡능선 산행했다'는 걸 명품처럼 소유하려는 문화가 생겼다. 자신의 체력이나 산행 경험, 장비는 무시한 채, '남들 가는 멋있는 공룡능선 나도 가겠다'는 욕망이 이성을 삼켜버린 것. 매 주말 숱한 초보자들이 공룡에서 큰 고생을 하고 내려온다. 집 근처 근교산에서 체력과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철저히 준비해서 공룡을 찾아야 한다.
2 겸손도 등산의 기술
사고사례를 조사하면서, 30년 넘도록 비슷한 사고가 계속 이어지는 걸 알았다. 3가지 사례만 소개하기 안타까울 정도로 경각심을 줄 만한 사고가 많았다. 사고사례는 달라도 등산 초보자부터 해외원정 다녀온 베테랑까지 본질은 같았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산을 과소평가하고, 날씨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겸손도 등산의 필수 기술이다.
3 나침반과 등고선 지도, 유물 아냐
암벽등반은 5.13급을 하고 해외원정을 다녀왔으나, 독도 능력은 제로에 가까운 산악인을 숱하게 봤다. 산에선 스마트폰이나 기계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등고선 지도와 나침반으로 길을 찾는 건, 구시대 유물이 아닌 산꾼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대피소를 1km 안에 두고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잡아 사고를 당한 사례가 허다했다.
4 최소한의 장비 없으면 입산 말아야
언제든 날씨가 급변할 수 있고, 탈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북한산만 해도 정상의 기온이 시내와 10℃ 이상 차이 나는 경우가 흔한데, 설악산 공룡은 훨씬 심하다. 사계절 언제든 보온옷과 장갑, 방수재킷, 충분한 행동식과 물을 준비해야 한다. 신발은 운동화 형태의 로우컷보다는 목을 잡아주는 미들컷 이상의 중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방수, 방한, 내구성, 부상 방지, 발의 피로도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5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등산 기술
공룡능선은 탈출로가 없다. 워낙 험해 지능선이나 골짜기가 낭떠러지에 가까워 탈출이 더 위험하다. 날씨가 나쁘거나, 몸 상태가 안 좋거나, 시간이 늦었다면, 공룡능선 진입하기 전에 되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 산에서 승부욕에 불타는 사람만큼 무모한 사람은 없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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