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 달려간 김정은, 30분 기다린 ‘지각왕’ 푸틴… 북·러 ‘위험한 회담’ [북·러 정상회담]

서필웅 2023. 9. 14.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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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5개월 만의 회담 스케치
김정은 “바쁜 일정에도 초대 감사”
방명록엔 “로씨야의 영광은 불멸”
러 매체 “金, 핵심시설 질문 쏟아내”
30분 회담 등 3시간 만남 뒤 만찬
金, 수호이機 생산공장 방문 예정

전용 열차 ‘태양호’를 타고 평양을 출발해 3박4일간 약 2700㎞를 달려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3일 오후 1시쯤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도착했다. ‘지각 대장’으로 악명 높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향해 “당신을 만나서 정말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김 위원장은 “바쁜 일정에도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두 정상의 두 번째 만남이 러시아의 최첨단 우주기지에서 성사된 것은 4년 5개월 전과는 사뭇 달라진 처지를 상징한다. 20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김 위원장이 ‘노 딜’로 끝난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다급히 우군을 찾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 후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 속에 푸틴 대통령이 북한의 막대한 무기·탄약 재고량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아무르 지역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지난 2019년 4월 회담 이후 4년 5개월 만에 대면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북한이 반대급부로 원하는 것은 러시아의 우주기술과 재래식 무기 첨단화, 식량 지원 등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의 최종 관문으로 꼽히는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지난 5월과 8월 두 차례 군사 정찰위성 발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푸틴 대통령이 극동 개발을 목표로 야심차게 띄운 ‘동방경제포럼’(EEF) 마지막 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뒤로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다.
두 사람은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우주기지이다.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푸틴 대통령 안내로 소유스-2 우주 로켓 발사 시설 등을 둘러봤다. 김 위원장이 방명록을 작성할 때에는 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거드는 모습도 포착됐다. 김 위원장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려 쓰는 특유의 필체로 “첫 우주정복자들을 낳은 로씨야(러시아)의 영광은 불멸할 것이다”라고 썼다.
로켓 발사시설 둘러보는 푸틴·김정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원 안 왼쪽)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오른쪽)이 함께 런치패드에 기립한 로켓을 올려다보고 있다. 크레믈궁 제공
김 위원장은 이곳의 핵심 시설을 둘러보면서 “다수의 매우 상세한 질문”을 했다고 러시아 국영방송 로씨야1이 전했다. 미국 CNN방송은 이곳을 시찰하는 김 위원장 모습이 “호기심 많은 학생 같았다”고 전했다. 그는 “부품을 포함해 (직경이) 8m인가”, “이 우주기지에서 발사할 수 있는 가장 큰 로켓의 추진력은 얼마나 되나” 등을 물었다. 우주기지 시찰을 마친 두 사람은 기지 내 ‘앙가라’ 미사일이 조립 중인 발사체 설치·시험동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했다고 타스통신 등이 전했다.
이날 정상회담은 보스토치니 기지 주요 시설 시찰과 함께 양국 대표단이 배석한 1시간30분간의 확대회담과 30분간의 일대일 단독 회담 등 총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이후 공동 기자회견 없이 곧바로 만찬 일정에 들어갔다. 만찬장에서 푸틴 대통령은 “북·러의 우호 강화와 북·러 주민의 안녕을 위해” 건배를 제의했고,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의 건강을 기원한다”며 건배 제의를 했다. 만찬을 마친 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우주기지를 떠났고, 푸틴 대통령은 손을 흔들어 김 위원장에게 인사했다. 회동 종료 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다음 행선지가 당초 알려졌던 수호이 전투기 생산공장이 위치한 하바롭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레와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봉쇄했던 국경을 다시 연 후 첫 정상회담 상대로 푸틴 대통령을 택한 것은 한국·미국·일본 3각 공조가 고도화한 가운데 러시아와의 밀착이 북한에도 긴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CNN과 인터뷰에서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러시아와 정말로 중요한 접촉을 다시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무기를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가스, 첨단 기술을 받을 수 있다. 가장 큰 승자는 김정은”이라며 “중·러 관계의 하위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졌던 러시아도 북한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한반도 전역에 지정학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회담을 열고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이 회담하는 것은 2019년 4월 이후 4년 5개월 만이다. 스푸트니크 제공
김 위원장은 전날 러시아 하산역에서 공식 환영행사를 가진 후 올레크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와 만나 양국 간 관광·농업 분야 협력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코제먀코 주지사는 “(북한) 보건 상황과 관련된 제한들이 해제되는 대로 연해주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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