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대출 완화·DSR 우회 상품 공급…가계빚 몸집 키웠다
가계신용 잔액 1862조8000억…세 분기 만에 다시 증가세
정부, 각종 규제 풀어 시장에 “집값 안 떨어진다” 메시지
긴축·고금리에도 대출 늘면서 실물·금융 간 불균형 확대
한국 경제의 최대 뇌관으로 꼽히는 가계부채가 올 2분기를 기점으로 몸집을 불리며 다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보통 통화정책이 긴축 기조에 있을 때 빚이 줄어드는 것과는 대비되는 이례적 현상인데, 정부가 부동산시장 연착륙을 목표로 연초부터 각종 대출규제를 완화한 것이 대출을 늘린 주요 원인으로 풀이된다. 결국 정부가 주택가격 상승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를 살리는 쪽으로 정책을 작동시켰다는 점에서 대출 규제 완화가 적절치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가계부채를 줄여나가야 할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의 적기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금리가 지속되고 성장도 둔화된 현재 상황에서 부채가 늘어나면 결국 실물경제에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13일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포괄적 가계빚을 뜻하는 가계신용 잔액은 올 2분기 말 1862조8000억원으로 1분기 말보다 9조5000억원(0.5%) 늘었다. 가계신용은 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4분기(-3조6000억원)와 올해 1분기(-14조3000억원) 연속 감소했지만, 세 분기 만에 다시 반등했다. 한은이 집계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올 1분기 기준 103.4%다. 가계가 지고 있는 빚이 나라 경제 규모를 웃돌고 있다는 뜻이다.
국제 비교를 해보더라도 한국의 가계부채 수준은 매우 높다.
국제결제은행(BIS) 통계를 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5.0%로 스위스(128.3%), 호주(111.8%)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0년대 이전까지 주요국에 비해 낮은 수준을 보였으나 2002~2003년 신용카드 사태, 2014~2017년 가계대출 규제 완화, 2020~2021년 코로나19 등을 거치면서 재상승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은은 2021년 8월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해 연 0.5% 수준이었던 기준금리를 올 1월 3.5%까지 올린 뒤 동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대출금리가 높아져 대출받은 사람들의 빚 상환부담도 커졌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통상 긴축 기조하에서는 가계부채가 둔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대출을 받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정화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5~7월 중 은행 주택담보대출은 월평균 5조7000억원 늘었는데, 이는 부동산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이 크게 확대됐던 2020년 1~10월 중 월평균 5조5000억원 규모를 웃도는 상당히 빠른 증가세”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가계대출이 다시 늘어난 가장 큰 이유를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에 따른 ‘주택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로 꼽고 있다. 정부가 부동산 대출 규제를 풀고, 특례보금자리론이나 50년 만기 주담대 등이 공급되면서 주택시장에 다시 돈이 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고금리의 충격으로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와 같은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고 부동산시장도 급격히 얼어붙자 금융당국은 각종 규제완화 조치를 내놓기 시작했다. 올 들어 규제지역 내 다주택자도 막혀있던 주담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30%까지 허용했다. 주택임대·매매업자에 대한 규제지역 주담대도 LTV 한도를 높였다.
여기에 청년층의 주거안정을 목적으로 출시된 정책금융상품인 ‘특례보금자리론’, 은행들이 앞다퉈 내놓은 ‘50년 만기 주담대’는 내집 마련을 위한 대출 수요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소득에 상관없이 9억원 이하 주택에 최대 5억원을 빌려주는 상품이다. 소득 요건이 없다는 점에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올해 1월 말 출시돼 지난 8월까지 유효 신청 금액이 35조4000억원으로, 당국의 공급목표치(39조6000억원)의 89.4%까지 도달했다.
은행들이 내놨다 뭇매를 맞고 있는 ‘50년 만기 주담대’도 DSR을 우회할 수 있는 상품이 됐다. 만기가 길어지면 같은 대출 조건이라도 한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만기를 꽉 채워 빚을 갚는 차주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50년 만기 상품은 ‘당장 내는 원리금은 줄이고, 대출한도는 늘려, 가격이 오를 것 같은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정부가 부동산 대출 규제를 풀면서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준 것이 가계대출을 늘린 요인”이라며 “자산가격이 금리가 오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오른다는 믿음이 생기면 결국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 교수는 “한국의 경우 DSR 예외가 적용되는 대출이 너무 많은데, 이것부터 예외없이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화영 연구위원 역시 “부동산 규제가 크게 완화된 가운데 인플레이션(물가오름세) 둔화가 금리 하락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 주택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근 경기 상황을 보면 민간 소비가 주춤하고, 성장세도 떨어져 있다. 한은이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상태여서 조만간 대출금리가 낮아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 이 같은 상태에서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과도한 가계부채는 취약차주를 중심으로 가계운용에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소비위축은 물론이고, 한계에 내몰린 자영업자의 경우 빚을 갚지 못할 위험도 높아질 수 있다. 박상현 연구원은 “동일한 부채 금액이라도 금리가 상승기에 있을 경우는 차환을 하거나 연장할 때 이자비용이 늘고, 경기가 안 좋으면 차환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3년간 불어난 대출과 고금리에 대한 이자 부담이 ‘빚 청구서’로 날아올 차례”라고 말했다.
지난달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을 보더라도 금통위 내부에서 가계부채 증가세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것으로 확인된다. 한 금통위원은 “민간부채 증가세 지속, 수도권 주택가격의 상승세 확대 등으로 실물과 금융 간 불균형이 다시 확대되고 있다”며 “특히 가계부채는 정책금융 지원 등 공급요인과 주택가격 상승 기대에 따른 수요요인이 중첩되면서 높은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보다 적극적인 정책대응이 시급해 보인다”고 밝혔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의 가파른 하락에 따른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대출 규제 일부를 풀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부동산시장 활성화는 재정지출을 줄인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기부양 대책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역대 보수 정부는 재정지출을 줄이는 대신 부동산 경기 부양을 통해 내수활성화를 추진했다. 재정을 아낀 만큼 재정건전성은 높아졌지만 가계대출이 늘어 가계건전성은 나빠졌다.
정부는 이달 말 부동산 공급 활성화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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