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고(故) 최용호 국장을 추모하며, 서시(序詩)

박재범 경제부장 2023. 9. 14.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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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개방경제에서 통화신용정책의 독립성은 어디까지인가?" 지금이야 익숙한 문제지만 비자발적으로 외환시장을 개방한 당시 상황에선 재무 관료에게도 낯설고 생소한 주제였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행정고시 상위권 성적으로 재경부에 들어온 수습사무관들은 질문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겉도는 답변을 늘어놓는다.

100점짜리 답변에 질문자는 깜짝 놀란다.

현실 탓, 규정 탓 하며 이리저리 피하지 말고 논리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며 질문해야 한다는 게 그가 남긴 진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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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최용호 금융위원회 국장

# 1998년 하반기,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고 한숨 돌릴 때다. 재정경제부 수습사무관들이 정식 배치를 앞두고 공통 질문을 받는다.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통화신용정책의 독립성은 어디까지인가?" 지금이야 익숙한 문제지만 비자발적으로 외환시장을 개방한 당시 상황에선 재무 관료에게도 낯설고 생소한 주제였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행정고시 상위권 성적으로 재경부에 들어온 수습사무관들은 질문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겉도는 답변을 늘어놓는다.

그 때 한 명의 사무관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한다. "환율을 포기하면 독립성을 지킬 수 있지만 환율을 포기하지 않으면 독립성에 제한이 된다". 100점짜리 답변에 질문자는 깜짝 놀란다.

# 2007년 가을 재경부 차관실. 재경부 금융정책국 주무서기관(총괄)이 된 그는 재경부차관에게 독대 보고 중이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법안소위원회를 앞두고 금융정책국 소관 법안을 사전에 점검하는 자리다.

테이블 위에는 법안이 담긴 서류 뭉치가 쌓여 있다.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 법안만 70개 남짓이다. 그는 모든 법안 내용을 설명하고 의미, 핵심 쟁점, 문제점, 정부 입장, 타협 지점 등을 세세히 언급한다.

법안 외 금융 현안 등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설명한다. 2시간 동안 '고수'들의 문답이 이어진다. 사실 파악(fact finding) 뒤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의 과정이다.

# 2014년 개인정보 유출로 대한민국이 난리다. 대통령 정보까지 유출된 터다. 정부는 우왕좌왕, 패닉 상태다. 새로운 유형의 이벤트였기에 더 그랬다.

기업 부실, 파산 등은 그나마 경험해본 위기였다. 이 사태는 A부터 Z까지 점검하려 해도 A와 Z가 어딘지 알 수 없다. 급박하게 투입된 그는 과장을 맡아 24시간만에 대책을 만든다. 2차 대책은 2시간만에 발표한다. 모두 그대로 실행된다.

과도한 규제 요구엔 서류를 집어 던지며 맞선다. 국회의원의 압박, 장·차관의 설득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 "초간삼간 태우실겁니까?". 비논리에 머리 숙이는 것만큼 그에게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것은 없다.

# 2023년 똑똑한 천재, 모르는 게 없는 천재, 소신이 강한 천재, 최용호 금융위원회 국장은 세상을 등진다. 25년 공직 생활은 한국 금융 그 자체다. 떠난 이를 추모하는 의례적 상찬이 아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법, 제도가 없다. 인터넷 뱅킹, 스마트폰 등이 존재하기 전 전자금융거래법을 설계했다.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금융위원회법, 중소기업 금융지원체계 개편,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우린 수많은 결과물로 그를 평가하고 추억한다. 하지만 이는 작은 단면일 뿐이다. 그저 '천재니까'라는 평가는 그의 정신을 오히려 훼손한다. 그는 항상 고민하고 질문했다. 법과 제도의 배경, 취지 등을 묻고 또 물었다.

# 그는 언제나 로직(logic·논리)을 중시했다. 어긋나면 부끄러워했다. 규정이 논리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했다. 끊임없이 자문했다. 법의 취지, 작동 원리를 이해해서 구동시키려 늘 고민했다.

"대한민국엔 3개의 헌법이 있어". 그는 종종 푸념했다. 대한민국 헌법 외 금산분리를 담은 은행법과 금융실명제법이다. 시장과 산업의 눈으로 제도를 고민하는 그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법의 존재는 '빌런(villain·악당)', 그 이상이었다. 그래도 포기하는 대신 "왜 못 고치지?"라며 자문(自問)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머릿 속엔 이미 조문 작업을 끝낸 답안지가 있지 않았을까. 건강이 악화됐을 때도 가상자산 담당 기구, 관련 법·제도 정비 방향 등을 후배들에게 설명하고 주문했을 정도였으니.

현실 탓, 규정 탓 하며 이리저리 피하지 말고 논리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며 질문해야 한다는 게 그가 남긴 진짜 유산이다. 최용호라는 소중한 자산을 잃은 것도 큰 슬픔이지만 그의 정신까지 끊긴다면 더 희망이 없다. 팩트를 찾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기자인 나도 '최용호 정신'을 되새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재범 경제부장 swallo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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