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사과하는 것이 낫다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2023. 9.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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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명령조 사과 요구, 상대방 공격하려는 의도
진심 담아 고개 숙여야지 강요하면 무슨 의미 있나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우리말에 ‘사과(謝過)하다’는 낱말이 있는데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뜻이다(표준국어대사전). 한자를 보면 사례할 사(謝)와 지날 과(過)를 써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인식하였으며 그 상황을 그대로 두고 넘어가지 않고 피해자나 관련자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를 말한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잃거나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지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에 사과를 꺼리게 되고 때로 사과를 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뺌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사과하는 사람이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표현할 때 용서할 의향이 높아진다. 피해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진심을 담아서 사과할 때 효과적으로 사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아시아 지역 유대 문화권에서 나온 ‘바벨 탈무드’를 보면 죄와 사과와 용서에 관해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과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면 안 되고, 속죄일을 믿고 이웃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등이다. 그러나 사과하는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요마’ 87 앞면).

한 번은 이르메야 랍비가 압바 랍비를 모욕하는 말을 해서 압바 랍비가 불평하는 일이 생겼다. 이르메야 랍비는 곧 잘못을 깨닫고 압바 랍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의 집 앞 뜰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때마침 어떤 여종이 더러운 물을 들고 나와 마당에 뿌렸고, 그 물이 이르메야 랍비의 머리에 쏟아졌다. 그는 그들이 자기를 하수구로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토라 본문을 암송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가 가난한 자를 쓰레기 더미에서 일으키셨다.” 압바 랍비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만나려고 밖으로 나왔다. 압바 랍비는 그에게 다가가 이제 자기가 화해를 청해야 되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토라에 ‘너는 가서 고개를 숙여 절하고 네 이웃에게 구하라’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람이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아름다운 광경을 그리고 있다. 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화려한 말솜씨나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태도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순간 사과라는 축제가 벌어졌고, 사과하기 전 단계의 개인은 사과한 이후의 개인으로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 두 사람과 또 그들을 둘러싼 사회는 단절에서 연결과 소통으로, 그리고 그 전 단계에서 절대 가능하지 않았던 협력과 창조라는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과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 ‘사과’라는 단어가 뉴스에 빈번하게 등장하여 어리둥절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과’를 따라오는 동사가 ‘하다’가 아니라 ‘하세요’라는 명령이다. 그러니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는 소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과를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고함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의 대표들이 우리가 맡긴 일을 하지 않고 기이한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대리한 국회의원이 어떤 사람의 잘못을 발견했다면 분명한 증거를 근거로 경찰에 고발하거나 사법기관에 고소를 해야 마땅하고,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범법자는 벌을 받고 정부는 발생한 피해를 회복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고 순리다. 그러나 법적인 조치 없이 상대방의 사과만 요구하는 것은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하다는 뜻이고, 이것을 ‘의혹’이라는 모호한 말로 표현하지만 소문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적인 일을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사과만 요구하는 태도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사과를 하면 자기 마음대로 용서를 해주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과를 요구하는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근거가 부족한 빈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개인과 사회를 한층 더 평화롭고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과라는 사회적 도구를 한낱 소문과 의혹을 퍼뜨리는 도구로 전락시키면서 말이다. 세계 곳곳에서 역사적 사명이나 정치적 신념보다 지지 집단의 환심을 사서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려는 정치가들이 늘고 있으나, 사과는 요구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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