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당장 봉합은 불가능했다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2023. 9.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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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로 열네 살 아이가 들어왔다. 키가 성인에 가까웠지만 앳된 얼굴이었다. 손목의 상처로 응급실을 찾았다고 했다. 아이는 한쪽 팔로 다른 쪽 손목을 감고 있었다. 급하게 상처를 지혈하다가 온 듯 화장지가 붙어 있었다.

“어떻게 다쳤어요?” “칼로... 칼에 다쳤어요.” 상처를 열자 평행한 칼자국이 눈에 띄었다. 명백한 자해 흔적이었다. “왜 이렇게 상처를 냈어요?” “힘들어서요. 그런데 피가 나서 치료받고 싶어요.”

상처는 깊지 않은 듯했다. 봉합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될 환자였다. 하지만 미성년자라서 보호자부터 확보해야 했다. “부모님이 오실 수 있나요? 선생님이 치료해주고 싶어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해요.” “안 돼요.”

아이는 완강했다. 절대로 부모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청소년이 하나쯤 가지고 있을 사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진료를 진행할 수 없었다.

“다른 보호자는 없나요?” “언니를 부를 수 있어요.” “성인인가요? 친척인가요?” “아뇨. 그냥 아는 언니인데.” “그렇다면 의미가 없어요. 선생님은 상처를 얼른 꿰매주고 싶어요. 그런데 부모님한테 알리지 않고는 해줄 수가 없어요. 혹시 연락할 수 없을까요?” “안 돼요. 그러면 저는 그냥 갈게요.”

아이는 정말 진료실을 나가려고 했다. 황급히 아이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선생님하고 조금만 더 이야기해요. 일단 소독하러 가요.” 아이를 처치실로 이끈 뒤 드레싱 세트를 꺼내 소독했다. 상처는 확실히 깊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강압적인 어른으로 보이지 않자 아이는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하여간 도움이 필요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아이였다.

“부모님과 다퉜어요. 저는 가수가 꿈이거든요. 노래랑 춤이 좋아요. 하지만 부모님은 싫어하세요. 제가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실망하실 거예요. 지금 학원에 있을 시간이기도 하고요.” “선생님을 봐서라도 부모님 연락처를 알려줄 수는 없겠지요?” “안 돼요. 그러면 집에 갈 거예요.”

사정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나는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눈앞에 열상이 있고, 나는 가운을 입고 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싶은 법이다. 일단 비용과 다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호자 동의 없이 치료하면 법적 문제가 있다. 내가 부모라도 자녀에게 영문을 알 수 없이 치료한 상처가 있다면 의아할 것이다. 당장 봉합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행정력을 약간 동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경찰이나 기관에 연락하는 것이었다. 특히 경찰에 연락하면 곧 신원을 조회해 줄 것이다. 하지만 미성년자라도 본인의 의지가 있다. 부모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데 경찰을 부르면 아주 나쁜 기억이 될 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어른을 한 명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물리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절대로 고려해서는 안 되었다. 결론적으로 아이는 치료할 수도 없고 전산에 남겨놓기도 어려운 손님이었다.

“선생님은 부모님과 연결되기 전까지는 상처를 봉합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마음의 상처도 중요하잖아요. 여기 앉아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선생님이랑 이야기해요. 여기 진료실 빈자리가 있어요. 얼마든지 있어도 돼요. 저는 나가서 다른 환자를 보다가 돌아올게요.”

“네….”

아이는 진료실에 남았다가 한 시간 뒤 나와 간식을 먹었다. 우리는 잠시 최신 아이돌을 화제 삼기도 했다. 두 시간 뒤 진료실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가보겠다고 했다. 나는 갈등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는 법이라고, 더 용기가 나면 부모님께 알리고 상처를 봉합하자고 했다. 아이는 거즈가 붙은 손목을 잡고 인사하면서 진료실을 떠났다. 오늘 아이는 법적으로 나의 환자가 아니었다. 잠시 곁에 머물다가 떠난 아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상처는 언젠가는 아문다. 아이는 언젠가 진료실에 잠시 앉아있던 기억을 지닌 어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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