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축구 발전은 성장 위한 좋은 자극제다[심재희의 골라인]
유럽 원정에서 독일과 튀르키예 격파
[마이데일리 = 심재희 기자] 1992년 여름이었다. 동아시아 국가 4개국이 출전하는 다이너스티컵이라는 축구 대회 첫 경기가 한일전으로 펼쳐졌다. 당시 한국은 제대로 된 '아시아의 호랑이'였다. 1986 멕시코 월드컵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연속 본선 진출을 이뤘다. 반면에 일본은 아시아에서도 강팀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확실히 한국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김호 감독이 이끈 한국은 호화멤버로 무장했다. 최인영 골키퍼를 비롯해 홍명보, 정용환, 박정배, 정종선, 최강희, 김판근, 이영진, 고정운, 김현석, 하석주가 선발로 출전했다. 훗날 한국 축구 레전드로 자리매김한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당연히 한국의 낙승을 예상했다. '일본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일본이 아니었다. 기술이 좋고 빨랐다. 특히 11번 선수가 눈에 띄었다. 양발을 다 잘 쓰고, 프리킥도 매우 잘 차고, 드리블 기술도 뛰어났다. 그가 바로 미우라 가즈요시였다. 팽팽한 승부 끝에 0-0으로 경기가 끝났다.
한국은 2차전에서 북한과 1-1로 비겼고, 3차전에서 홈팀 중국을 2-0으로 꺾었다. 일본은 2차전에서 중국을 2-0으로 제압했고, 3차전에서 북한을 4-1로 대파했다. 대회 규정대로 조별리그 1, 2위 팀이 결승전을 치렀다.
다시 만난 한국과 일본. 비가 엄청나게 와 수중전이 펼쳐졌다. 한국이 전반전 중반에 정재권의 환상적인 왼발 발리 슈팅으로 선제골을 낚았다. 후반전 중반까지 계속 리드를 지켰다. 그대로 이기는가 했으나 역전을 당했다. 브라질 출신의 루이 라모스의 스루패스에 수비가 연속해서 무너졌다. 후반 37분 나카야마 마사시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연장전에 돌입해 전반 6분 다카기 다쿠야에게 역전골을 얻어맞았다. 황당함이 밀려오는 사이에 김정혁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중계 화면에 일본의 역전골 리플레이가 나오는 사이에 한국이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동점골 장면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한국은 2-4로 뒤지며 일본에 우승을 빼앗겼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에 밀렸다. 일본이 J리그를 출범하고 세계적인 스타들을 영입해 시나브로 발전하는 사이 격차가 좁혀졌고, 결국 추월 당했다. 1993년 도하의 기적도 일본전 0-1패배 이후에 극적으로 나왔고, 월드컵 예선 등에서 일본을 만나면 상당히 고전했다. 냉정하게 볼 때, 일본의 빠른 패스와 오버래핑, 중원 플레이 등이 우리보다 더 나았다.
당시 일본 축구의 발전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J리그에 한국 선수들이 많이 진출하고, 일본을 동반자로 인식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일본 축구에 대한 존중과 치열한 경쟁 의식으로 한국 역시 함께 발전했다. 선진 축구를 흡수하고 새롭게 프로리그를 출범해 강해진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꽤 많았다.
2023년 지금. 일본축구는 새로운 황금기를 열었다. 우연이 아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과 스페인을 꺾으며 저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난 6월 일본에서 치른 친선전 두 경기를 모두 대승으로 장식했고, 최근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을 4-1, 튀르키예를 4-2로 완파했다. 최근 4경기 18득점 4실점을 기록했다.
성적만큼 경기력도 좋다. 유럽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을 주축으로 최상의 팀 조직력을 발휘한다. 특히, 전형의 탄력도와 맞춤형 전술이 뛰어나다. 상황에 맞게 기본 전형에 변화를 줘 경기를 안정적으로 진행한다. 무리하게 공격 일변도로 나가지 않고, 힘을 분배해 정공과 역습을 섞어 시도한다. 독일과 스페인 같은 강팀을 꺾은 원동력은 이런 부분들을 잘 융화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여전히 일본보다 선이 굵은 축구를 구사한다. 특히 최전방 공격진의 무게감과 파괴력에서 우위를 점한다. 경기력의 기복을 꽤 보이고, 한 수 아래 팀을 만나도 쉽게 이기지 못하는 부분은 약점이다. 물론 오랫동안 팀을 이끈 감독이 물러나고 새 사령탑을 세웠으니 좀 더 기다리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2024년 1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2023 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진 않다.
약 30년 전 일본축구가 갑자기 발전해 한국을 추월했을 때와 다른 느낌이 든다. 그때는 일본은 우리와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일본이 잘하는 부분을 잘 벤치마킹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더 강해질 수 있다. 일본 축구의 놀라운 성장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가능성과 맞닿는다. 우리 대표팀이 일본의 발전을 좋은 자극제로 삼길 기대해 본다.
[한국 선수들(빨간 유니폼 상의), 일본 선수들(파란 유니폼 상의).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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