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꿈을 크게, 판을 넓게
경쟁국들도 괴롭긴 마찬가지
그동안 축적한 역량·자산 주목
인재·기업·산업 모두 세계 정상급
공든 탑 쉽게 무너지지 않아
'코리아 피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조일훈 논설실장
우리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나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위기감에도 객관화가 필요하다. 주변국 사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만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는 거의 모든 산업국가가 당면한 문제다. 정도와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비가 충분하지 않기로는 피차 마찬가지다. 국가경쟁력도 상대적으로 봐야 한다. 우리에게 겹겹의 괴로운 사정이 있듯이 경쟁국인 일본 독일 중국 대만도 각자 ‘자신만의 지옥’에 시달리고 있다. 첨단 산업의 미국 공급망 기지로 떠오른 일본은 정작 반도체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메모리 패권을 한국에 넘겨준 이후 뿔뿔이 흩어진 기업과 기술자들을 다시 모으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한번 망가진 생태계는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만약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5년을 현 정부가 뒤집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원전 생태계도 궤멸했을 것이다. 언제 떠올려도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독일의 지옥도는 바로 탈원전에서 비롯됐다. 전력 공급이 부족한 가운데 러시아 가스 도입이 어려워지자 제조업 경쟁력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믿었던 중국 시장의 수요 둔화와 자동차산업 부진은 올해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돌려놓을 분위기다. 대만도 탈원전에 따른 두 차례의 대정전 여파, 중국의 위협 등으로 반도체산업의 안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개방 이후 역대급 고난에 봉착한 곳은 중국이다. 회심의 반도체 굴기는 미국의 강력한 공급망 봉쇄로 좌초 직전이다. 화웨이 스마트폰에 장착된 7나노급 AP는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적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이 자체 기술로 한국 반도체를 추격하는 것은 사실상 무망해졌다. 이렇게 보면 애플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의 선도적 역량을 그다지 폄하할 것도 아니다. 엔비디아가 열어가는 인공지능(AI)칩 시장은 고성능 메모리 공급을 확대할 새로운 기회다. 단언컨대 전 세계 어떤 첨단제품도 한국산 D램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수백조원을 쏟아부어 철옹성 같은 진입장벽을 구축한 데 따른 정당한 보상이다.
한국이, 반도체가, 한류가 언젠가 피크를 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바로 내리막길은 아니다. 활력 없는 일본 경제를 향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부자 나라다. 정치, 디지털, 여성 활용에 약점이 있어도 인구, 기술, 기업, 도시, 문화는 훌륭하다. 1992년 3만달러 도달 이후 한 번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우리는 2017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진입한 이후 올해로 7년째를 맞고 있다. 4만달러, 5만달러를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3만달러대를 지속적으로 방어할 수만 있어도 선진국 대열을 유지할 수 있다.
앞날에 대한 한없는 걱정, 숱한 약점을 잠시 접어놓고 우리가 일군 성과와 지금 갖고 있는 역량과 자산에 주목해보자. 나아가 세계 중심 국가, 윤석열 대통령 비전대로 ‘글로벌 중추국가’로 올라서는 단계에 있다는 희망을 품어보자.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한국은 경쟁국들에 대단히 경이적이면서도 두려운 존재다. 도처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공든 탑을 쌓아놓았다. 전기 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 철강 석유화학 등에 폭넓게 구축한 공급망은 독보적이고 이상적이다. 여기에 최근 한화가 주도하는 방산까지 가세했다. 30년 전부터 중국에 밀릴 것이라는 조선산업은 아직도 세계 1위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휘발유를 수출해서 먹고산다. 직접 보여주지 않았으면 미쳤다고 할 발상이다. 현대자동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는 누적 판매 100만 대를 넘어섰다. 생산 차량의 40% 이상이 해외에서 팔려나간다. ‘일본의 자랑’ 렉서스가 마침내 사정권에 들어왔다.
한국에는 상식 박스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득실댄다. 구미 어느 업체가 미국에 냉동김밥을 수출해 대박을 친 사례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맛과 품질, 냉동 기술, SNS 마케팅 등은 개별적으론 대단할 것이 없다. 하지만 해외시장 개척과 도전이라는 큰 꿈이 얹히자 성공의 스케일이 달라졌다. 만두로 미국 시장을 석권한 CJ제일제당이나 라면으로 현지 입맛을 사로잡은 농심 등은 대기업이라서 그렇다 치자. 어느 골목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김밥을 태평양 너머로 보낸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나온 것일까. 우리의 일하는 방식과 성취욕, 국제화 수준은 세계 정상급이다. 꿈을 크게, 판을 넓게 키워야 할 시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순간이 크고 작은 변곡점이고 전환의 갈림길이다. 언제 어렵지 않은 시절이 있었던가. ‘코리아 피크’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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