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가해자가 무죄라고…피해자는 선고 이유 몰라도 되나
배심원·재판부 판단 같을 때
자세한 사유 적지 않도록 해
“작성 시간 부족, 재판에 집중”
법조계선 ‘알 권리 침해’ 우려
성범죄 사건, 특히 문제 소지
“검증 못해 깜깜이 판결 될 것”
대법원장 자문기구인 사법행정자문회의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형사사건에서 시민 배심원과 법관 재판부 판단이 같을 경우 판결문에 판결 이유를 적지 않도록 예규를 개정하기로 해 법원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법원이 왜 유죄나 무죄를 선고했는지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 피고인은 물론 피해자와 검사, 나아가 시민의 알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3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사법행정자문회의는 지난 6일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평결과 재판부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 판결문 이유 기재를 생략하도록 ‘형사판결서 작성방식 적정화에 관한 예규’를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위법성 조각 사유나 형 가중·감면 이유 등(필요적 기재사항)은 판결문에 적어야 하지만 범죄 구성요건이 성립하는지, 범죄의 고의가 있다고 인정하는지 등 피고인 주장에 대한 판단(임의적 기재사항)은 적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자문회의는 국민참여재판은 통상 재판 당일 판결을 선고해 판결문 작성 시간이 부족하고, 최근 판결문이 점점 길어져 법관들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 때문에 예규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판결문에 자세한 판결 이유를 쓸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충실한 재판을 하는 게 낫다고도 했다. 법관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5%가 임의적 기재사항 생략에 찬성한 점도 근거로 들었다.
법원 안팎에선 이 같은 예규 개정이 피고인이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와 피해자, 검사, 시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유죄 이유를 모르니 항소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찾기 어렵고, 피해자와 검사 입장에서도 무죄 이유를 모르니 입증을 보강해야 할 부분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결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힘들어지고, 1심 판단이 적절한지 검토해야 하는 2·3심도 판결 이유를 모른 채 심리하게 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피고인과 피해자에게는 판결 이유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며 “현행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유지한다면 이유 기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판결문 작성이 어렵다고 이유 기재를 생략하는 것은 법관 편의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경우 최근 가해자들이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을 이용해 무죄를 받아내는 사례가 왕왕 있는 터라 판결 이유를 적지 않는 게 더욱 문제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피고인은 서울의 한 클럽에서 술에 취한 피해자를 경기도 외곽 모텔로 데려간 뒤 성관계를 시도해 준강간 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문장만 기재했을 뿐 상세한 무죄 판단 이유를 적지 않았다. 2심에서 피해자가 법정에 나가 진술까지 했지만 무죄가 선고됐다. 2심 재판부 역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 내용을 구체적으로 판결문에 담지 않았다. 지난 4월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고 법조계와 학계, 시민사회에서 ‘문제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피고인에게 준강간의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인데, 이는 자문회의가 판결문에서 생략해도 된다고 정한 임의적 기재사항에 해당한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피해자는 왜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됐는지 알 방법이 없다” “판결 이유가 누락돼 판결에 대해 평가나 검증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깜깜이 판결이 된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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