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지평 너머]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의 역할

김준기 기자 2023. 9.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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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있다. 먹고살 만해야 이웃이나 사회를 살필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학과장을 지낸 벤저민 프리드먼 교수는 여러 나라의 경제성장과 사회·정치·도덕적 발전의 관계를 연구해 이 속담을 실증적으로 살펴봤다(<경제성장의 미래>). 연구의 결론은 경제가 성장하는 사회는 관용과 다양성, 사회적 유동성, 공정성 및 민주주의가 개선된다는 것이다. 반면 경제성장이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사회는 이런 요소들이 퇴보한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미국의 예를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부터 오일쇼크가 닥친 1973년까지 미국 경제는 강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법적·제도적 근절 장치가 마련됐고, 폐쇄적인 이민정책이 완화돼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신 이민이 급증했다. 노인과 빈곤층에 대한 건강보험 제공 등 각종 복지제도가 본격화됐고 언론의 자유가 신장됐으며, 유색인종이나 여성의 대학 진학과 사회 진출도 급증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경제가 침체되면서 유색인종의 대학 입학 특례조치가 축소되고 불법 이민자에 대한 탄압과 혐오가 거세지고, 최저임금은 정체됐으며 빈곤층 지원 복지프로그램에 대한 반대도 커져갔다.

경제가 성장해 소득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용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가 정체되면 사람들 사이에 좌절감이 생기고 이는 편협함과 옹졸함, 개방성에 대한 반감을 양산한다. 특히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핵심 조건인 서로를 신뢰하는 의지를 손상시킨다는 것이 프리드먼 교수의 분석이다.

시장경제 체제는 성장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성장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금융기관이나 기업, 개인은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고 투자가 없으면 경제는 멈춘다. 흔히들 진보는 분배를, 보수는 성장을 우선시한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어느 진보 정부도 성장을 무시한 적은 없다. 중도진보로 분류되는 미국의 클린턴·오바마 행정부는 물론 현 바이든 대통령도 성장에 주력해 왔고, 한국에서도 어느 정권이든 성장을 추구했다. 어떻게 성장을 이룰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에서 구별될 뿐이다. 성장 없이는 분배도, 복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성장의 위기’에 빠져 있다. 올해 우리 경제는 1%대 저성장이 확실시된다. 더 심각한 것은 성장률 전망치가 점점 하향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7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1.5%에서 1.4%로 낮췄다.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은 상향조정한 것과 대조된다. 내년 전망도 어둡다. 한은은 지난달 내놓은 수정 경제전망에서 내년도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3%에서 2.2%로 내렸다. 해외 주요 투자은행(IB) 상당수는 1%대 전망도 내놓고 있다. 2년 연속 1%대 성장에 그친다면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54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경제의 어두운 전망이 확산되는 것은 핵심 성장동력인 수출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와 소비도 부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많은 국내외 기관들이 성장률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정부 재정지출 감소다. 이런 와중에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로 편성하면서 미래 성장동력의 핵심인 연구·개발(R&D) 예산을 16.6%나 줄인 것은 성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정부는 국가채무 증가를 최소화하는 건전재정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 같은 긴축의 원인 중 하나는 지난해부터 시행한 대규모 감세정책이다. 감세와 건전재정은 양립하기가 어렵다. 2000년대 초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대규모 감세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감세로 인한 경기부양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테러와의 전쟁’에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면서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는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어났다.

프리드먼 교수는 “시장의 힘만으로는 대체로 너무 적은 성장을 낳게 될 것이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정부 정책의 역할”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도그마화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감세냐 증세냐, 지출 확대냐 건전재정이냐 등의 정책적 선택은 정권이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당시 경제상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세계적인 조류다.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들 위험에 처한 지금 감세와 긴축재정은 올바른 선택지가 아닌 듯하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jk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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