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권력의 횡포 대하는 그들의 방법
종3품 도호부사인 갑산(현 함경남도 갑산군 일대)부사도 상급기관 횡포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1789년 음력 7월23일 갑산부에서 가까운 진동진 만호 노상추가 갑산부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면, 얼마나 심경을 털어놓을 데가 없으면 노상추에게까지 이러한 편지를 보냈을까 싶다. 갑산부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함경도 병영 영장(營將)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갑산부에서 올리는 공물도 병영에서 관할했는데, 이번 갑산부 공물 진상에 문제가 있었던 듯했다. 일과를 마친 후 노상추가 서둘러 갑산부사를 찾은 이유였다.(출전 <노상추일기>)
이야기는 약 열흘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은 지역별로 공물을 왕에게 진상했는데, 갑산부에 부과된 공물은 녹용이었다. 무관들이 다스리는 지역이므로 사냥을 염두에 둔 처사였겠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이 사슴을 사냥해서 녹용을 진상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정에서 필요 개수를 정하면 병영에서 각 고을에 이를 나눠 부담시켰고, 각 고을에서는 약재 채취를 담당했던 심약(審藥)을 통해 녹용을 구매해서 진상했다. 이번에 갑산부는 녹용 24대를 부담했는데, 다행히 갑산부사는 품질 좋은 녹용을 구할 수 있었다. 왕에게 올릴 공물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진상품은 매월 보름, 즉 음력 15일에 봉합했는데, 당시 이를 확인했던 갑산부사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진상한 품질 좋은 녹용은 사라지고, 품질 낮은 녹용으로 대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품질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차익금을 횡령했던 터였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이 문제를 크게 비화시켰는데, 문제는 이후 처리였다. 며칠 뒤 공물 진상 담당 아전인 예방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갑산부사를 찾았다. 갑산부사가 녹용 진상을 문제 삼자 병영에서 사람이 나와 갑산부 예방과 향청 좌수를 체포하여 곤장을 때렸다고 했다. 이를 보고받은 갑산부사는 화가 나 사직서와 함께 “왕에게 진상하는 막중한 일에 좋은 품질의 녹용을 숨겨두고 낮은 품질의 녹용을 진상했으니 이는 대역죄와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왕에게 보고하여 사람들의 죄를 논하지 않고 (갑산부) 좌수와 예방만 고문합니까?”라는 항의문을 보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병영의 영장 태도였다. 그는 이 항의성 사직서를 받아들고 격노했다. 그는 병영 차원에서 공식 문건을 보내 다시 좌수와 예방을 잡아들이고, 갑산부사를 향해 “왕께 보고하여 갑산부사의 죄를 논하겠다”며 엄중한 경고까지 날렸다. 갑산부사가 노상추에게 편지를 보내기 직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런데 영장은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상추가 갑산부에 도착할 때쯤 진상과 관련이 적은 병방 소속 군관과 이방, 호방, 그리고 수형리(首刑吏)까지 잡아들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갑산부사의 거취 역시 뻔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갑산부사는 담담했다. 그를 걱정해서 달려온 노상추를 보면서 “영장은 왕께 보고하여 나의 죄를 논하겠다고 하지만, 결국 녹용 진상을 담당했던 장교만 잡아가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라면서 오히려 안심하라고 했다. 실제 이 문제가 조정에 보고되면,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이 기록이 있던 해, 정조는 녹용 공물 진상 폐단을 엄격하게 단속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따라서 갑산부사가 이 문제를 따지면 영장 역시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영장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욱 강하게 갑산부사 주위를 압박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은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힘을 최대로 동원하기 마련이고, 또 그러한 방법이 대체로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안의 올바름을 알고 있는 갑산부사는 영장 위의 권력인 왕의 판단을 신뢰했다. 바르지 못한 권력의 횡포가 어렵지 않게 해체된 이유였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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