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정치 혼란 '최악의 결합'…리비아 홍수로 5000명 이상 사망 추정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북아프리카 리비아 홍수 사망자가 5천 명, 실종자는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기후 위기와 정치 불안이 맞물려 피해를 키운 인재라는 분석이 나온다.
12일(현지시각)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리비아 동부를 통제하는 정부의 보건부 장관은 지난 주말 리비아 동부를 강타한 폭풍 다니엘로 인한 사망자 주검 1500구 이상을 발견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매장됐다고 밝혔다. 동부 정부 대변인 모하메드 아부 라무샤는 국영 매체에 사망자가 53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국제적십자 및 적신월사 연맹은 실종자가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피해는 북동부 해안가에 자리 잡은 인구 10만 명의 도시 데르나에 집중됐다. 짧은 시간 동안 4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며 데르나 인근 두 곳의 댐이 붕괴돼 주민과 건물들이 급류에 휘말려 그대로 지중해로 휩쓸렸다.
데르나를 방문한 동부 정부 민간 항공부 장관인 히쳄 아부 치키와트는 <로이터> 통신에 "주검이 바다, 계곡, 건물 밑 등 어디에나 있다"며 "많은 건물이 붕괴됐고 도시의 25%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통신은 데르나 거리가 진흙과 잔해로 뒤덮여 있었고 건물은 유실되고 자동차들은 지붕 위에 뒤집혀 있었다고 전했다.
데르나 주민 모스타파 살렘(39)은 홍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고 있었고 아무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그는 이번 홍수로 친척 30명을 잃었다.
물이 위층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아내와 어린 딸과 대피해 살아남은 라자 사시(39)는 나머지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는 "처음엔 폭우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정께 큰 폭발음이 들렸다. 댐이 터지는 소리였던 것"이라 회상했다.
통신은 리비아 북서부 트리폴리 공항에서 만난 한 여성이 가족 대부분이 죽거나 실종됐다는 전화를 받고 통곡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의 친인척은 "가족 중 한 두 사람이 아니라 한 가족당 최대 10명씩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복수의 댐이 무너지며 인명 피해가 커진 가운데 해당 댐들은 장기간 유지 보수 없이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데르나 부시장인 아흐메드 마드루드는 <알자지라>에 "해당 댐들은 2002년 이후 유지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규모도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붕괴된 첫 번째 댐 높이는 70미터(m)에 불과하고 이 댐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며 두 번째 댐에 무리가 왔고 결국 두 번째 댐도 붕괴했다고 설명했다.
댐의 안전성에 대한 경고도 여러 차례 나온 바 있어 이번 사고가 "인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의사이자 미국 워싱턴DC에 기반을 둔 비영리단체 미국-리비아 관계 협의회(NCUSLR) 회장 하니 셰니브는 알자지라에 "데르나 댐들의 침식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2011년부터 과학 저널 등에서 반복적으로 문제가 보고돼 왔다"고 설명했다.
<로이터>는 리비아 오마르 알무크타르대 수문학자 압델와니스 아슈르가 지난해 펴낸 논문에서 해당 댐들의 정기적인 유지보수를 위한 즉각적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며 "큰 홍수 발생 땐 이 지역 주민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덧붙였다.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댐 관리에 실패한 것은 리비아의 극심한 정치 혼란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리비아는 2011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몰아낸 아랍의 봄 혁명 뒤 통합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다. 서부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트리폴리 통합정부(GNU)가 통치하고 있지만 데르나가 속한 동부는 리비아 국민군(LNA)이 장악해 별도의 정부를 세운 상태다. 정부가 부재한 상태로 해당 댐들 뿐 아니라 도로를 포함한 전반적인 기반 시설 정비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평가다.
더구나 데르나 지역은 2019년 동부 정권이 장악하기 전 이슬람 무장집단이 통제했던 곳으로 동부 정권이 불신감 탓에 이 지역을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AP> 통신은 잘렐 하차우이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연구원이 동부 정부가 점령 뒤에도 이 도시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으며 주민들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해 왔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당국이 수 년 간 데르나를 방치했고 "유지 보수가 부재했으며 모든 것이 계속 지연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지역에 대한 불신이 재난 이후 상황 수습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8일 일어나 29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진과는 달리 리비아를 덮친 폭풍의 경로는 이미 수일 전부터 예견됐기 때문에 정부의 대피 지시가 제 때 나오지 않은 것이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리비아 싱크탱크 사데크연구소 국장인 아나스 엘 고마티는 <뉴욕타임스>(NYT)에 모로코 지진과 리비아 홍수가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며 폭풍 다니엘로 인한 사상자가 그리스 등에서 이미 보고된 상황에서 리비아 당국은 댐을 점검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거나 경고할 어떤 진지한 계획도 없어 보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자연 재해라 불리지만 인간의 행위로 초래됐고 리비아 정치 엘리트들의 무능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홍수는 "기후 변화가 정치 갈등 및 경제 실패와 결합해 어떻게 재난의 규모를 키우는지 분명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은 다니엘과 같은 '메디케인'(medicane·'지중해'와 '허리케인'의 합성)은 이 지역에서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통상적으로 관찰되지만 이 지역이 올 여름 폭염에 시달리며 지중해 수온이 올라가 메디케인이 더 많은 물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유엔(UN)은 지난해 지구 온난화로 지중해 물이 팽창해 해수면이 올라가 해안선이 침식되고 홍수를 일으킬 수 있으며 특히 리비아의 저지대 해안 지역이 이러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대립 중인 양쪽 정부는 피해 복구 및 구호 관련해 협력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피해가 동부에 집중된 상황에서 국제 지원은 서부 정부를 통해 이뤄질 수 밖에 없어 조율에 난항이 예상된다. 현지 의료 상황은 매우 열악한 상태다. <알자지라>는 셰니브 회장을 인용해 데르나에서 "침실 5개가 있는 임대 빌라"가 유일한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짚었다.
<뉴욕타임스>는 서부 정부에 더해 튀르키예(터키), 아랍에미리트(UAE)등 외국에서 파견된 구호 인력들도 속속 동부 벵가지에 집결 중이지만 도로가 끊겨 250km 가량 떨어진 데르나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데르나 시의회는 긴급 국제 지원을 촉구하며 도로가 끊긴 상황에서 구호를 위한 해상 통로를 열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2일 성명을 내 리비아 홍수 관련 미국이 구호단체에 긴급 자금을 보내고 있으며 추가 지원 제공을 위해 리비아 당국 및 유엔과 협력 중이라고 밝혔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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