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과 강박의 사이

김경락 2023. 9. 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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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김경락 | 경제산업부장

논쟁은 이름 붙이기 단계에서 절반은 판가름 난다. 판을 장악하는 데 있어 사안 성격을 규정하는 이름 붙이기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문제는 이름 붙이기부터 밀고 당기기가 치열하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가 재정 운용과 관련해 ‘건전 재정’이라고 이름 붙인 건 그 자체로 전략적이다. 낱말 자체에 긍정성을 담은 터라 정부의 재정 기조에 대한 이견은 ‘불건전 재정론’이라고 손쉽게 몰아세울 수 있어서다.

현 정부 전에는 재정 기조는 다른 표현으로 서술됐다. 긴축/균형/확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건전과 같은 ‘도덕’은 담겨 있지 않다. 거시경제 상황에 대한 판단과 재정의 지속가능성, 불평등에 대한 재정의 역할 등 평가자가 각자 두고 있는 강조점에 따라 재정 기조의 적절성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 긴축/균형/확장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악이거나 선은 아니다.

하지만 정책 기조에 도덕적 의미를 담아 이름 붙이는 건 사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한 예로 과거 정권들은 ‘비정상의 정상화’(도대체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박근혜 정부), ‘적폐 청산’(도대체 누가 적폐를 규정하는가?·문재인 정부)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오늘날 비정규직 제도의 기본 틀이 된 2003년 비정규직법 제·개정 당시 노동계는 ‘개악법’ ‘비정규직 확산법’이라고 했으나 당시 노무현 정부는 ‘개혁법’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했으며 ‘친기업 정책’을 구태여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라고 한 이명박 정부도 있었다.

경제 정책은 감정은 쏙 뺀 숫자로 구성된 세계가 아니다. 외려 삶과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인 터라 어떤 영역보다도 첨예한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쉽다. 그래서 경제 정책도 도덕이 깃든 ‘정치 언어’의 대상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재정의 중요성에 견줘 ‘건전 재정’이란 표현의 등장은 뒤늦은 감도 있다.

문제는 그런 정치 언어가 과도한 나머지 현실을 가리거나 토론을 방해할 때다. ‘건전 재정’은 그런 점에서 나쁜 예라고 본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건전 재정 기조의 강화’라고 설명한다. 이는 아마도 역대급으로 낮은 총지출 증가율(2.8%)을 근거로 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건전 재정’을 재정 적자 내지 국가 부채를 잣대로 논한다면 이번 예산안도 ‘불건전 재정’이다. 총지출 증가율을 크게 낮췄지만 총수입이 총지출에 미치지 못해 적자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부 보수 언론은 이런 점을 짚어 ‘무늬만 건전 재정’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건전 재정’이란 이름 붙이기가 낳는 좀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역대급 낮은 총지출 증가율은 쪼그라든 총수입에 총지출을 꿰맞춘 결과인데, 총수입 부족은 정부의 세수 예측 실패와 무리한 감세 정책이 버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해 건전 재정은 정부의 무능과 아집에 기반한다는 얘기다. 무능과 아집의 결과가 ‘건전’을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된 셈인데, 건전 재정이란 표현의 규정력이 이런 점을 가린다.

재정 논의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는 점도 건전 재정이란 정치 언어가 낳는 또 다른 문제다. ‘미래 세대를 위해 건전(긴축) 재정이 필요하다’는 단일 명제만 정부는 강조한다. 세대 간 문제를 빼놓고 재정을 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정은 통화정책과 함께 정부의 거시경제 운용의 핵심 수단이라는 점, 시장 양극화를 보정하는 재분배 장치라는 점이 건전이라는 이름 아래 간과된다. 때론 적자(또는 부채) 확대가 초긴축(초건전?) 예산보다 국가신용등급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건전 재정’이 설정한 ‘재정 중독’ ‘재정 만능주의’ 프레임 속엔 설 자리가 없다.

중독은 병리학에서 쓰는 말인데, 사실 재정 기조와 관련해 또 다른 병리학적 평가를 담은 표현도 있다. ‘부채(재정) 강박증’이 그것이다. ‘건전 재정’처럼 한국의 특정 정권이 만든 말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초유의 저물가·저성장 상황이 이어지는데도 각국 정부가 재정만큼은 움켜쥐려는 상황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저명한 학자들이 만든 ‘정치 언어’다. 정부 부채 확대에 따른 손익은 따져보지도 않고 적극적 재정 운용에 나서지 않는 각국 정부의 태도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취지였다. 현 정부의 ‘건전 재정’은 조금 더 심화하면 ‘강박 재정’이란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는 정치 언어에 밀려날 수도 있겠다 싶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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