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배운 의술이니 힘이 닿는 한 봉사해야죠”
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0㎞ 떨어진 쓰촨성 짱족(티베트족) 자치주의 한 마을. 해발 3500m인 이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지난달 23일 아침 7시부터 주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손자 손을 잡고 온 할머니와 친구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온 중년 남성, 근처 절에서 수도하는 승려 등 20~30여 명이 금세 모여 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베이징에서 온 의료 봉사단이다. 경력 20여 년의 한국인 중의사 김인근(59)씨와 영춘권 동호회 소속 중국인들로 이뤄진 의료 봉사단은 2018년부터 해마다 두 차례 마을을 방문해 2박 3일간 의료 봉사를 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봉사단이 온다는 소식을 중국판 카카오톡인 위챗으로 주고받으며 삼삼오오 게스트하우스를 찾는다.
전날 오후 마을에 도착한 김 원장과 봉사단원들이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틀차 봉사 활동에 들어갔다.
“저쪽에 가서 약을 받으세요.”
김 원장이 손자와 함께 온 체스티에(66) 할머니의 진맥을 한 뒤 ‘4번 1개’라고 쓰인 처방전을 건넸다. 4번은 풍습 관절염을, 1개는 10일치 약을 가리킨다. 김 원장과 봉사단은 마을 사람들이 많이 앓는 질환 10개를 추려 1부터 10까지 번호를 매기고, 각각에 맞는 약을 준비해 왔다. 김 원장은 “여기는 가파른 산악지대로 일교차가 매우 크다”며 “이 때문에 관절염을 앓는 이들이 매우 많고, 폐렴과 고혈압, 담낭염, 위염 등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봉사 초기 처방전을 써서 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마을 사람들이 약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베이징에서 중의약을 환약으로 만들어 가져오고 있다.
2017년부터 중국인 봉사단원들과
의료 환경 취약한 장족 마을 찾아
매년 2박3일씩 대여섯 차례 봉사
“3500m 고지대라 관절염 환자 많아”
1992년 유학…12년 만에 면허 따고
베이징 왕징서 개업한 1세대 한국인
“봉사활동 연간 10여 회로 늘릴 계획”
체스티에 할머니가 봉사단으로부터 약을 받은 뒤 의자에 앉자, 김 원장은 그의 양 무릎에 대여섯 방씩 침을 놨다. 할머니는 장족 말로 감사하다는 뜻인 “카추카추”를 연신 반복했다. 침을 놓은 지 30분이 지나자 봉사단원이 침을 뽑고 면봉으로 피를 닦았다. 체스티에 할머니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 보건소가 있지만, 너무 멀고 의료 수준도 높지 않다”며 “베이징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와 치료를 해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종일 170여명의 주민이 찾아왔지만, 김 원장과 봉사단은 물 흐르듯 착착 일을 진행했다. 김 원장이 진맥하고 침을 놓으면, 봉사단원들이 약을 준비했다. 침을 뽑거나 부항을 뜨고, 안마하는 것도 봉사단 몫이다. 사흘 동안 봉사단을 찾은 마을 사람들은 300명이 넘었다.
김 원장은 밤에는 마을로 직접 내려가 환자 30여명을 추가로 진료했다. 밤 10시가 넘어도 환자들이 찾아왔다. 김 원장은 “간단한 질병은 치료가 어렵지 않은데, 류머티스성 관절염같이 일 년에 두어번 오는 것으로는 별 효과가 없는 질병이 많다”며 “이런 상황을 볼 때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 봉사단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이 마을 근처 큰 절의 스님이 베이징에 강연을 왔고, 여기 참가한 김 원장이 스님의 의료 활동 요청을 승낙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 원장은 “스님이 마을의 의료 상황이 열악하다며 와 달라고 하길래, 별 고민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스님과 인연이 있던 영춘권 동호회 소속 중국인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 봉사 활동에 참여한 중국인 봉사단은 영춘권을 배우고, ‘중의학’과 ‘김 원장’을 신뢰하며, 봉사 활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한국 돈 40만 원에 이르는 항공료를 내고, 수십 종의 환약과 파스 등을 직접 사고, 휴가를 내 이곳에 왔다. 녹차 사업을 하는 이즈(38)는 “봉사 활동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오기를 잘한 것 같다”며 “다음 활동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김 원장으로부터 중의학을 배우며, 중의사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다.
김 원장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한·중 수교 다섯달 전인 1992년 3월 중의학을 배우러 중국에 왔다. 이후 꼬박 12년이 걸려 중의학 박사학위를 따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베이징의 한국인 밀집 지역인 왕징에 중의원을 열었다. 중국에서 중의학을 배워 개업한 1세대 한국인이다. 그와 함께 중의대에 입학한 한국인이 100명이 넘지만, 의사 면허를 딴 이는 많지 않다. 개업 초 김 원장의 병원에는 한국인 환자가 많았지만, 재중 한국인이 줄고 중국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현재 병원을 찾는 환자의 90% 정도가 중국인이다.
김 원장은 이곳 외에 의료 상황이 열악한 지역 두 곳 등 총 3곳을 정기 방문하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중국인 봉사단원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는 현재 일 년에 대여섯 차례인 봉사활동을 연간 10여 차례로 늘릴 계획이다. 그는 “사람을 치료하는 재능을 갖게 됐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는 의사로서 이를 널리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며 “평일에 사흘씩 빠져야 해 생업에 지장이 없지 않지만, 힘이 닿는 한 봉사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쓰촨/글·사진 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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