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영광 출신 수은 강항 선생”…포로 문학의 백미 ‘간양록’ 저술
"최초 이름은 죄인이 탄 수레를 뜻하는 「건거록」...제자 윤순거가 1656년 책 간행 때 건양록으로 수정"
"간양(看羊)은 양을 돌본다는 의미로 충절을 상징...적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적중봉소 등으로 구성"
"수은 강항,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평가받아 日에서 더 유명...영광에 그를 기리는 내산서원 건립"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_7hF6shULRo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 노성태: 오늘 시간에는 정유재란 당시에 왜에 포로로 끌려간 뒤에 탈출해서 포로 문학의 백미로 알려진 간양록이라고 하는 책을 남기신 영광 출신 수은 강항 선생님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윤주성: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 선생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강항 선생이 남긴 간양록이라는 책 제목은 저한테는 조금 생소합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라고요?
◆ 노성태: 강항이 남긴 간양록 그러니까 1980년에 MBC가 이것을 원본으로 제작해서 방영했던 다큐 드라마 이름인데요. 그 드라마 주제곡이 조용필 가수가 불러서 히트시킨 간양록이라는 노래인데요. 1980년도에 방영되었으니까 아마 중·장년 정도 되시는 분들은 그 애절하게 가수 조용필이 불렀던 간양록이 아마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은데요. 가사는 이런 것입니다.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라는 가사입니다.
◇ 윤주성: 장년 이상이 돼야 아실 것 같은데요. 간양록, 조용필 씨가 부른 노래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는 수은 강항 선생이 외에 포로로 끌려간 뒤 귀국한 이후에 쓴 책 이름이네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가수 조용필의 애절한 노래 속에서 기억되고 있는 간양록, 그 간양록이 조선 중기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영광 출신의 유학자 수은 강항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서 고향 땅을 그리며 쓴 기록임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윤주성: "간양록은 원래 건거록이라고 했다"는데 책 이름 건거록이 간양록으로 바뀐 이유도 궁금하네요?
◆ 노성태: 처음 책 이름을 건거록이라고 짓습니다. 건거의 건(巾)은 부모를 입은 상주가 머리에 쓰는 두건이니까 죄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요. 거(車)는 수레이니까 건거라고 하는 것은 죄인이 탄 수레를 뜻하는 말 그러니까 포로가 된 자신을 죄인이라는 뜻에서 건거, 이런 이름을 사용했고요. 그런데 1656년 효종 때인데요. 책이 간행될 때 제자 윤순거가 강항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건거록에서 간양록으로 이렇게 고치게 됩니다.
◇ 윤주성: 간양록은 어떤 의미를 품은 이름인가요?
◆ 노성태: 간양이라는 말은 한나라 때, 한나라 신하였던 소무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지만, "한나라의 지조를 지켰다"는 "부절은 양을 돌보다가 닳아 떨어졌네" 여기에서 따온 말입니다. "닳아 떨어진 부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나라 무제가 준 징표였던 부절을 소무가 지팡이로 삼아 양을 쳤는데 포로 생활 19년 동안 항상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절의 털이 모두 떨어져 나갔고 그것을 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닳아 떨어진 부절이라고 하는 것은 한 무제가 준 징표였던 부절 곧 충절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책 이름 간양록은 "왜에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지만 조선에 대한 지조, 충절을 결코 버리지 않은 올곧은 선비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 윤주성: 충절과 지조를 뜻하는 간양록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 노성태: 포로 생활 기간이 4년이었는데요. 이 책은 일본에서 임금에게 올렸던 「적중봉소」라든가 일본의 지도를 그렸던 「왜국팔도육십육주도」 또는 포로들에게 주는 글 「고부인격」, 부인이 포로라는 뜻이고요. 간양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고 그때 느낀 점을 한시로 적기도 했고 그리고 전란에 대비했던 대책까지 기록하고 있는 오늘날로 보면 일본 현지 보고서 당시 포로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책이지요.
◇ 윤주성: 간양록을 남긴 강항 선생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신 분인지도 궁금하네요?
◆ 노성태: 명종 22년이면 1567년입니다.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강극검의 아들 5명 중 넷째로 태어났고요. 호는 수은입니다. 수은 강항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5살 때 글을 짓고 7살 때 맹자를 외웠고 "9살 때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라고 하는 시를 지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전주에서 치러진 특별 과거 시험인 전주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그래서 교서관 정자가 된 후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1595년에는 교서관 박사 그리고 96년에는 공조좌랑, 형조좌랑에 오르게 됩니다.
◇ 윤주성: 강항 선생 임진왜란 중에 과거에 급제해서 관리가 되신 분인데요. 1596년에 공조와 형조좌랑을 지내는데 언제, 왜 왜의 포로가 된 것인가요?
◆ 노성태: 1597년이면 정유재란이 다시 발발한 해거든요. 이때 31살이었는데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정유재란을 당해서 호조 참판 이종광의 종사관이 되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게 됩니다. 그런데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졌고 남원이 함락되고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 도중에 영광 앞바다에서 왜군에게 잡혔고 그래서 일본 오쓰 성으로 압송이 되는데 일본 현지 보고서라고 불린 간양록이 쓰이게 된 이유가 되겠습니다.
◇ 윤주성: "강항 선생이 오늘날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가 궁금해요.
◆ 노성태: 앵커님 말씀대로 일본에서 훨씬 유명한 분이지요. 왜냐하면 일본 오쓰시 시민회관 광장에 강항을 기린 현창비가 세워져 있는데 현창비 옆에 강항을 소개하는 글을 소개했는데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쓰시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에도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일본에서 유명하신 분이지요.
◇ 윤주성: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 선생,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가 되었다니 놀라운데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은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하는 승려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강항 선생은 붙잡혔고 그래서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됐는데 그때 그를 찾아온 이가 말씀드렸던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였습니다. 강항의 학문적 깊이에 감동했던 후지와라는 승복을 벗고 성리학자 강항의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후지와라에게 전해진 성리학 이후 에도시대 일본의 정치 이념이 됐고요. 그래서 일본 성리학의 출발에 후지와라라는 일본 승려가 있었는데 그 뒤에 강항 선생이 있었던 것이지요.
◇ 윤주성: 강항 선생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진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귀국 후에 임금이 불렀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도 궁금해요.
◆ 노성태: 강항은 일본 막부의 귀화 요구를 거절하고 몇 번의 탈출 끝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귀국한 강항을 선조가 불렀고 그래서 일본 현지 상황에 대해 파악한 것을 정리하여 올렸는데 그것을 간양록이라는 것이지요. 1602년 강항에게 대구 교수라는 직함이 내려졌지만 사직했고 1608년에는 순천 교수에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습니다. 그가 대구 교수를 곧바로 사임하고 순천 교수에 부임하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를 적군에게 포로가 된 죄인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향 영광에서 저술 활동,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신 분이지요.
◇ 윤주성: 그의 흔적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 노성태: 그가 태어난 영광군 불갑면에 가면 내산서원이 건립되어 있고요. 입구에는 관복 차림의 동상도 서 있습니다. 아무튼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영광 출신 강항 선생. 그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조선의 지조를 지킨 선비였고 또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한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지금 남아있습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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