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내전’ 리비아, 기후재난 속수무책…“수천명 주검 썩어가”

김미향 2023. 9. 1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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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덮쳐 5300명 넘게 사망 “1만명 이상 실종”
카다피 정권 붕괴 뒤 내전 수렁…댐·도로 방치
열대성 폭풍우로 댐이 무너져 대홍수가 난 북아프리카 리비아 북동부 도시 데르나에서 12일(현지시각) 건물이 물살에 휩쓸려가 마을이 폐허가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틀째 계속되다 11일(현지시각) 새벽 집중된 폭우로 댐이 붕괴한 리비아에서 거대한 탁류에 휩쓸려 숨진 이들이 5천명이 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도 최소 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10년 넘게 정치 불안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닥친 뜻밖의 집중호우가 최악의 참사로 변했다.

리비아 동부를 관할하는 잠정정부 내무부 대변인은 12일 현지 국영 티브이에서 동북부 도시 데르나에서 숨진 이들만 53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하루 전엔 2천여명이 숨졌다고 밝혔지만, 한나절 만에 갑절 넘게 희생자 수가 늘었다. 아랍권의 국제구호단체 적신월사(IFRC)도 이날 브리핑을 통해 이번 대홍수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가 1만명 이상 발생했다고 밝혔다.

폭우는 11일 새벽 약 4시간 동안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한 아운 하와리(41) 리비아 저널리스트협회 사무국장은 “11일 새벽 1시 무렵부터 내리던 비가 2시부터 강해졌다.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는 비였다”고 말했다. 결국 3시간 남짓 이후인 새벽 4시 반 탁류가 도시를 덮쳤다. 지중해성 기후인 리비아 연안부에선 비가 내려도 5~10㎜ 정도지만, 이날은 무려 100㎜에 이르는 비가 왔다.

영국 비비시(BBC)가 전한 항공 사진을 보면, 댐 붕괴로 발생한 거대 탁류가 데르나를 덮쳐 시가지 전체가 엉망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알자지라는 탁류로 인해 인구 12만5천여명이 살던 도시 동쪽 4분의 1이 송두리째 휩쓸려 나갔다고 전했다. 잠정정부 당국자 히샴 슈키우아트는 비비시에 당시 도시를 덮친 탁류에 대해 “눈앞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지진해일(쓰나미) 같았다”고 말했다. 도시는 모든 전기·통신이 끊기는 등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진다.

로이터 통신도 탁류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는 온통 진흙으로 뒤덮였고, 지붕이 날아간 건물과 뒤집힌 자동차가 이곳저곳에 방치된 상태라고 전했다. 데르나의 한 병원 복도엔 주검이 나뒹굴고 있고, 실종된 가족을 찾으려는 이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데르나에서 자원봉사 중인 한 의사는 시엔엔(CNN)에 “사람들은 썩어가는 주검을 처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이번 홍수가 약 3천명이 숨진 1927년 알제리 홍수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가장 큰 홍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12일(현지시각) 대홍수가 할퀴고 간 리비아 북동부 도시 데르나에서 전복된 차량을 앞에 놓고 한 남성이 한숨에 젖어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열대성 폭풍우로 댐이 무너져 대홍수가 난 북아프리카 리비아 북동부 도시 데르나에서 12일(현지시각) 마을 전체가 물살에 휩쓸려가 폐허가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번 참사의 1차 원인은 리비아를 덮친 사이클론 ‘다니엘’이 몰고 온 집중호우였다. 지난주 그리스에 치명적 홍수를 가져온 강력한 저기압은 지중해로 이동해 사이클론으로 발달했다. 대기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올 7~8월 세계 기온이 기상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그로 인해 해수면 온도가 급상승해 열대성 폭풍우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지중해 인근에선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폭염 등 전례 없는 기후 재난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집중호우를 거대 참사로 만든 것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10년 넘게 이어지는 내전 때문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이 기간 동안 리비아에선 댐·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재해를 예측·대비할 수 있는 기상 예측과 경보 시스템 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일주일 전부터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여러 나라를 강타했지만, 재앙적 인명 피해가 발생한 곳은 리비아뿐이다. 리비아 정책연구센터 ‘사데크 연구소’의 아나스 고마티 소장은 ‘엑스’(옛 트위터)에 “이것은 인재이며 리비아 정치 엘리트들의 무능”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며 “지난주 다니엘이 지중해 연안에서 리비아로 다가오는데 아무도 댐을 점검하지 않았고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동서로 양분된 정치 상황은 국제 구호의 손길도 늦추고 있다. 동부를 장악한 리비아국민군(LNA)은 국제사회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국제 구호단체들은 유엔의 승인을 받은 서부 트리폴리 통합정부(GNA)를 거쳐야 한다. 영국 오픈유니버시티(개방대)의 환경시스템학 강사 레슬리 메이번은 시엔엔에 “리비아의 복잡한 정치 상황은 위험 상황에서 구조 작전을 조정하거나 소통하고 댐과 같은 중요 인프라를 유지·관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준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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