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현대 질병명은 의사와 한의사의 공유 영역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를 임무로 하고 한의사는 한방 의료와 한방 보건지도를 임무로 한다(의료법 제2조 제2항). 의사와 한의사는 각각 그 의료행위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고(의료법 제3조 제1항 제1호)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의료법 제27조 제1항).
문제는 각자의 면허범위가 무엇인지 법에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방 의료행위를 정의한 법률은 한의약육성법이다. 한의약육성법(제2조 제1호)은 이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韓醫學)을 기초로 한 한방 의료행위와 이를 기초로 하여 과학적으로 응용·개발한 한방 의료행위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이걸 봐도 전통 한의학이 무슨 뜻인지, 과학적 응용·개발은 어디까지인지 여전히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추상적 용어의 구체적 적용을 위해서는 법의 해석이 필요하고 최종적인 법해석 권한은 대법원에 전속한다. 한의사의 면허 범위인 한방 의료행위의 의미와 범주, 그리고 한계를 정하는 것도 결국은 대법원이라는 얘기다.
한의사가 초음파를 사용하는 것은 한의사의 면허 범위 내에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2022년 12월 22일에 나왔다. 2023년 8월 18일에는 한의사가 뇌파계를 써서 파킨슨병과 치매를 진단하는 것이 한의사의 임무에 포함된다는 대법원의 판단도 나왔다.
이렇게 되면 초음파와 뇌파계는 의사의 면허 범위인 의료행위에도 들어가고 한의사의 면허 범위인 한방 의료행위에도 포함된다. 세상에는 이처럼 양쪽에 다 포함되는 행위도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갈수록 이 영역이 커진다. 의료기술이 발전하고 응용영역이 확대되면서 학문의 융복합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중간적·혼합적·중첩적 의료영역이라고 부른다.
의사와 한의사의 가장 큰 중첩적 의료영역이 바로 현대 의학의 질병명 진단이다. 현대 한의사는 현대 의학의 질병명에 따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계획을 세운다. 이때 쓰이는 질병코드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s, KCD)다. 의사의 서양 의학적 진단행위에도 똑같은 KCD가 사용된다.
대법원은 단순히 한의사가 초음파와 뇌파계를 사용할 수 있다고만 판단하지 않았다. 현대 과학기술의 도구를 통해 현대 의학의 질병명으로 환자를 진단하는 것이 한의사의 면허 범위 내라고 보았다. 진정한 의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초음파 판결에서 증거로 제출된 진료기록부에는 자궁의 두께가 수치로 기록되었고 진단명도 현대 의학적 질병명인 자궁내막증식증으로 기재되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한 KCD 코드도 당연히 'N85.0'에 해당하는 자궁내막선증식증이었다. 뇌파계 판결은 아예 파킨슨병과 치매라는 서양 의학적 질병명으로 진단한 행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대법원은 바로 그 진단행위가 한의사의 역할임을 선언하였다.
의사와 한의사는 왜 통일된 진단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
우선 KCD의 존재 이유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KCD는 모든 형태의 기록에 기재된 질병 및 기타 보건문제를 분류하기 위하여 정한 것이다. 보건의료 통계를 작성할 때 표준화한 기준을 적용하여야 일관성 있고 비교 가능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진료하든 한의사가 진료하든 같은 환자다. 같은 기준에 의해 진단되고 분류되고 통계화되어야 한다.
소통을 위해서도 통일된 진단기준은 필수다. 우리나라 환자의 일상적인 의료이용 행태는 양방과 한방 양쪽의 중복 또는 혼합활용이다. 한의사에게는 양약과 한약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의무가 있다. 필요한 경우 상급병원에 전원 조치할 의무도 있다. 환자와 대화하고 상급병원과 소통하고 직역 간에 협진하기 위한 기본적 언어가 바로 KCD, 즉 현대의학의 질병명이다.
KCD의 공동사용은 의료과오 유무의 판단, 치료결과의 평가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의료행위에 과실이 있는지를 알려면 대상질환이 특정되어야 한다. 치료성과가 좋은지 나쁜지도 대상질환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KCD는 한의학의 과학화와 정보화를 촉진하고 국민의 합리적인 의료선택권을 보장한다. 한의학이 기초과학, 공학기술, 서양 의학과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문 간 연계가 보장된다. 양·한방에서 같은 진단명을 써야 국민은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 의료기술 간 경쟁과 협력도 많아진다.
대한의사협회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이 오진의 위험을 높일 거라고 우려한다. 그런데 한의사는 KCD, 즉 현대 의학의 질병명으로 환자를 진단할 것이 강제되어 있다.
환자 진단을 해야 하는 한의사에게 진단도구인 의료기기는 사용하지 말라? 기기를 써서 진단하면 오진율이 높아지고 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오진율이 낮아진다는 말인가. 국민의 건강과 의료소비자의 선택권을 우선하는 발상은 아닌 것 같다.
의사는 현대 과학기술을 독점하는 집단이 아니다. 의사가 현대 의학의 질병명을 진단하는 유일한 면허권자인 것도 아니다.
뇌파계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한의사에게 (파킨슨병과 치매라는) 현대 의학의 질병명으로 진단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데 있다. 정부가 한의사에게 KCD 사용을 강제했다면 당연히 KCD 진단을 위한 도구의 사용도 인정했어야 한다. 정부의 조정능력 부재로 지지부진하던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권을 대법원이 확인하고 선포한 것이다.
앞으로 한의사와 의사의 중간적·혼합적·중첩적 의료영역은 더욱 커질 것이다. 진단용 의료기기뿐만 아니라 치료용 의료기기 및 의약품을 비롯한 의료기술 도구의 다수가 공유될 것이다. 의사·한의사의 역할은 사용 가능한 도구의 종류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한의학은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의 체계를 갖추고 의학과 한의학 간 역동성 있는 상호작용과 융복합 발전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의료일원화로 가는 길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최혁용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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