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전여빈이 연기한 세상의 모든 ‘권민주’에게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대만드라마 ‘상견니’의 리메이크작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너의 시간속으로’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전여빈이 연기한 ‘권민주’ 캐릭터가 가슴을 울렸다.
안효섭(남시헌·구연준 역)과 전여빈(권민주·한준희 역)의 1인 2역으로 눈길을 끈 이 드라마에서 권민주 캐릭터는, 능력있고 당당한 또 다른 배역 한준희와 달리, 자존감이 굴 파고 들어가 존재감이 공기같은 캐릭터다. 하지만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 속 우리 곁에 버젓이 존재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다만 귀 기울이는 이들이 드물 뿐.
그런 권민주 시각에서 드라마 ‘너의 시간 속으로’를 들여다보자.
그래! 그 아이 남시헌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배경은 농구코트가 분명하고 주변으로 머슴애들이 번잡하게 움직였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눈에 든 것은 오직 남시헌과 그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뿐이었다. 그렇게 혼자만 가슴 뛰는 은밀한 비밀은 시작됐다.
외삼촌(박혁권 분)의 27레코드 가게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를 감상하고 있었다. 남시헌이 친구 한 명과 함께 들어섰다. 심장은 콩닥콩닥거리고 눈동자는 갈 길 몰라 방황하고 머리는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 날의 대화는 똑똑히 기억한다.
“여기 락밴드 앨범은 어딨어?” “네? 아, 락밴드는 저 쪽에 있어요.” 남시헌이 얼굴을 들이민다. “너 우리반 아냐?” “네.” “근데 왜 존댓말야?” “나, 나를 어떻게 알아?” “니가 시험날이면 뒤에서 내 시험지 걷어갔잖아.”
남시헌은 틀어놓은 노래가 좋다며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를 찾았지만 마침 재고가 없었다. 기대도 않던 순발력이 튀어나왔다. “이름이랑 연락처 남겨놓을래? 나중에 앨범 나오면 내가 연락해주면 되잖아.” 시헌은 친구를 불렀다. “야, 정인규, 니 번호 남겨 니가 찾아다주면 되잖아.” 인규(강훈 분)는 착했다. “니 번호 남겨. 니꺼잖아.” 그렇게 시헌의 삐삐번호를 얻었다.
놀라운 날이었다. 사실 민주는 스스로를 싫어했다. 손잡이 망가진 주전자처럼 느껴져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혼자였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반 아이들 대부분에게 한 번 쯤 인사를 건넸을 것이고 아이들도 한 번 쯤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인사하면 아이들은 처음 보듯 대꾸했다. 답해줄 용의는 충만하지만 묻지 않는 질문에 답할 도리는 없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쳐다보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스쳤지만 감촉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섞여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아 “나 여깄어!”를 외쳐봐야 아이들에겐 닿지 않았다. 그렇게 민주는 고립돼왔고 자존감은 하루하루 누추해졌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혼 준비 중인 부모가 소리 높여 싸우는 이유는 남동생 권도훈(이민구 분)의 양육권 뿐이다. 두 사람 모두 민주의 거취에는 관심도 없다.
그런 민주를 눈길 마주치는 것도 황송한 남시헌이 알아봐 주었다. 정인규도 다정하게 대해줬다. 두 아이는 민주에게 언감생심 친구를 제의했다. 그렇게 민주에게 친구가 생겼고 행복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 제 것인 줄 알았던 행복은 언제나처럼 제 차지가 아니었다.
그 날은 생일날였다. 놀랍게도 시헌과 인규가 생일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 부모조차 망각한 민주의 생일. 민주는 처음으로 남의 축하를 받아봤다. 조촐한 셋만의 파티는 인규가 말해주지 않은 이유로 빠진 후 파했다. 시헌의 스쿠터 뒷자리에서 민주는 행복했다. 집 앞에서 시헌에게 서지원의 테이프를 건넸다. 시헌은 테이프 안쪽에 적어둔 ‘이 음악이 너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데려가 주길..’이라 쓴 글귀에 멈칫했다. 그때 그만뒀어야 했다.
행복에 들떴던 모양이다. 게다가 인규 얘기만 줄곧 하는 시헌이 답답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촛불 끄며 빈 소원을 말해버렸다. “니가 좋아할만한 여자 되게 해달라구. 그래서 언젠가는 너도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시헌은 비수를 꽂았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거야.”
확실히 나쁜 일은 쌍으로 온다. 차이고 들어온 집안은 난장판. 엄마(장혜진 분)도 도훈도 사라졌다. 엄마는 끝내 도훈만 데리고 잠적한 모양이었다. 실연의 서러움에 버려진 서러움까지 겹친 민주는 정신없이 엄마가게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양 눈으로 쏟아드는 헤드라이트 불빛.
정신을 차렸을 때 민주는 제 몸에 갇힌 사실을 깨달았다. 교통사고는 아니고 누군가 머리를 가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엉뚱하게 몸을 차지한 인물은 2023년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한준희였다.
한준희는 달랐다. 움츠리고 주눅 든 민주의 몸을 가지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보기만해도 가슴 뛰던 시헌을 구박하고 짝꿍이건 선생님이건 형사건 할 말 다하고 돌아다닌다. 그런 한준희를 시헌이 그윽하게 바라본다. 애정이 담뿍 담겨있음을 감출 생각도 안한다. 민주로선 한번도 영접치 못한 표정으로 달떠있었다. 민주는 그런 한준희가 부러웠다.
내막은 모르지만 몸을 찾았다. 대신 한준희가 몸 안에 갇혔다. 부러웠던 한준희처럼 살기로 했다. 하지만 한준희 행세는 순식간에 들통났다. 시헌은 눈동자만 들여다보고도 권민주의 본색을 알아채 버렸다.
꿈은 사라졌다. 닿지못할 욕심이었다. 추레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현실로부터 도망칠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더는 힘내서 살아볼 자신이 없다.
몸 안의 한준희가 그렇게 우려하던 살해당하는 방법이 솔깃하다. 흔해 빠진 자살이라면 애도 유효가 얼마나 갈까? 하지만 살인사건의 피해자라면 그렇게도 끼어들고 싶었던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줄 것이다. 시헌 역시 보다 길게 안타까워 할 것이다. 권민주에게 그만하면 커다란 추모가 될 것이다.
그렇게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민주를 몸 안의 준희와 언제나 이해한다는 인규가 기를 쓰고 말린다. 주저앉게 도와주진 못할망정 힘을 내란다. 포기한 이를 응원하다니 잔인한 것들. 아니 세상이 잔인한 거겠지.
전여빈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교복도 정장도 어색함 없이 소화하듯 A급 사회구성원 한준희와 사회부적응자 권민주도 시차없이 연기했다. 특히 낯설 수 있는 소외자 연기를 호소력 있게 선보였다. 전여빈이 연기해서 권민주의 아픔이 더 도드라진 느낌도 든다.
어쨌거나 극 중 민주는 세상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다. 세상의 많은 민주들도 그럴 것이다. 세상이 유념할 바는 그들이 포기하기 전에 귀기울이는 것이고 세상의 민주들이 유념할 바는 한 걸음만 더 나가면 탄탄대로를 만날 지 모른다는 점이다. 삶이란 것이 워낙 별 일이 다 생기니 세상의 어느 민주에게나 기적같은 순간은 언제든 올 수 있다. 그런 믿음 한 자락 품는 순간이 최고의 행운일 수도 있겠다.
/zaitung@osen.co.kr
Copyright © OSE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