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5개월 만에 재회한 북·러 정상···방명록에 “로씨야 영광은 불멸”

선명수 기자 2023. 9. 1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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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0일 평양에서 출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용 열차는 13일(현지시간) 오후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이 열리는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인근 기차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측 인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김 위원장은 전용 차량을 타고 오후 1시쯤 우주기지에 도착해 이곳에 30분쯤 먼저 도착해 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양국 정상의 만남은 2019년 4월 이후 4년5개월 만이다.

현지 언론이 보도한 영상을 보면 전용 차량에서 내린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며 “반갑습니다”라고 말했고, 푸틴 대통령은 “잘 오셨다”며 맞이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이렇게 바쁜 속에서도 우리를 초청해주시고 환대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실내로 안내하며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우주기지”라고 소개했다.

회담에 앞서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함께 걸으며 우주기지 내 시설을 소개했고, 김 위원장은 방명록도 작성했다. 방명록을 작성하는 김 위원장 옆에는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부부장은 2019년 북·러 정상회담 때는 김 위원장을 수행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방명록에 ‘첫 우주 정복자들을 낳은 로씨야(러시아)의 영광은 불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러시아가 냉전 시절 미국보다 앞서 우주 개발에 나선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옛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다. 앞서 김 위원장은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러시아 천연자원부 장관으로부터 유리 가가린 등 과거 소련 우주 비행사들의 사진과 사인을 선물받기도 했다.

타스통신은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과 함께 우주기지 내 소유스-2 우주 로켓 발사 시설을 시찰했고, 러시아의 신형 안가라 로켓의 조립·시험동을 둘러봤다고 보도했다. 유리 트루트녜프 극동 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와 유리 보리소프 러시아 연방우주공사(로스코스모스) 사장 등이 두 정상에게 안가라, 소유스2의 성능 등을 설명했다. 타스통신은 “북한 지도자는 주의 깊게 (설명을) 경청했고, 로켓 연료의 특성과 발사체의 낙하 위치, 이동 원리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고 전했다.

우주기지를 시찰한 뒤 양국 정상은 회담을 시작했다. 다만, 두 정상은 모든 일정을 비밀리에 진행했던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례적으로 모두 발언은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당초 이번 정상회담은 2019년 4월 회담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것이란 관측이 나왔지만, 양국 정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0㎞ 가까이 떨어진 러시아의 최첨단 우주시설을 회담 장소로 선택했다.

푸틴 대통령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EF) 일정을 마친 뒤 약 1000㎞를 이동해 이곳에 도착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일 평양에서부터 타고 온 전용 장갑열차로 우주기지 인근 기차역에 내린 뒤, 회담 장소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했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러시아가 패권주의 세력에 맞서 자기 주권적 권리와 안전,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의 위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회담 이후 이어진 공식 만찬에서 두 정상은 건배를 주고받으며 양국의 전략적 협력 강화를 천명했다. 김 위원장은 만찬장에서 “영웅적인 러시아 군대와 인민이 승리의 전통을 빛나게 계승해서 군사작전과 강국 건설의 두 전선에서 고귀한 존엄과 명예를 힘있게 떨치리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고 평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선대 북한 지도자들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새로운 친구 두명보다 옛 친구 한명이 좋다는 러시아 속담은 우리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면서 “북러의 우호 강화와 북러 주민의 안녕을 위해” 건배를 제의했다.

외신들은 이번 정상회담 만찬 메뉴로 무화과와 천도복숭아를 곁들인 오리 샐러드, 캄차카반도산 킹크랩으로 만든 만두, 물고기 수프를 이어 메인 요리로 감자·버섯을 곁들인 철갑상어와 구운 야채를 곁들인 쇠고기 스테이크가 나왔고, 디저트로는 잣과 연유를 곁들인 바다 갈매나무 셔벗과 타이가 링곤베리, 주류로는 러시아 남부 디브노모르스코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레드 와인이 제공됐다고 전했다.

만찬을 마친 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우주기지를 떠났다. 푸틴 대통령은 손을 흔들며 김 위원장에게 인사했다. 러시아 국영방송 리아노보스티는 김 위원장이 회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 순방을 계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회담이 끝난 뒤 푸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김 위원장과 공개적인 의견 교환을 했다”면서 “러시아가 국제적 의무를 준수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군사 기술 협력의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가 북한에 협력할 수 있는 농업 분야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리아노보스티는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회담에서 핵전쟁 위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번 북러 정상회담이 약 4시간에 걸친 이날 일정으로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담이 중요하고 실질적이었다”며 “북한이 항공과 수송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에 관심이 있다”고 전했다.

정상회담 이후 공식적인 공동선언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러시아 관영 리아통신은 “북한, 러시아, 중국에는 정상회담 후 공동선언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절차가 없다”고 밝혔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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