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과학기술정책’
내년에는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5조2000억원이나 삭감된다. 올해보다 16.6%나 줄어드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1991년 이후 처음이지만 실질적으로 과학계가 역사상 처음 겪는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개발 현장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노조, 출연연 연구자, 공무원 노조를 비롯한 10여 개 단체가 ‘연대회의’(국가과학기술 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이공계 학생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연구 현장의 실무자와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학생들이 연구개발 예산을 걱정하는 현실은 절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정작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직접 수행해왔던 주역인 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 많던 교수도 사라졌고 과기행정을 책임졌던 전임 장관도 찾아볼 수 없다. 수많은 학회(학술단체)‧총연합회‧한림원도 꽁꽁 숨어버렸다.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오해한 전임 출연연 기관장들의 엉뚱한 목소리가 요란하다. 과기계를 공평하게 나눠먹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잘하는 연구자’가 독식하는 거친 야생의 ‘카르텔’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퍽한 잔치를 벌이려면 ‘쥐꼬리’ 100만 개가 아니라 퉁퉁하게 살찐 ‘돼지’ 한 마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고 ‘현안’과 ‘미래’를 두고 오락가락하는 정권의 눈치를 살피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잖은 충고도 있었다고 한다.
● 실망스러운 ‘카르텔’의 정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혁신본부장이 모두 ‘약탈적 이권 카르텔’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인정해버렸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감염병(코로나19)과 같은 단기적 이슈에 집중된 예산 투입이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비효율의 늪에 빠뜨려 버렸고 중소기업에게 관행적으로 뿌려주는 보조금도 문제였다고 한다. 출연연의 비효율도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지적도 서슴치 않았다. 제1차관 출연연을 확실하게 뒤엎을 특공대를 조직했다고 밝힌 모양이다.
소부장과 감염병 대응 예산의 투입은 국가의 명운이 달려있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난 정부가 10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긴급 예산을 투입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상적인 예산 편성‧집행의 절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소중한 국민의 세금을 투입하는 사업을 철저하게 관리할 여유가 없었다. 급하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고 돌다리를 두들겨볼 여유도 없었다.
위기 상황에서 긴급하게 이루어진 예산 투입에서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었다. 실제로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의 추가적인 횡포를 차단하고 감염병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가시적인 정책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소부장과 감염병 대응 예산 투입은 상식적인 연구개발 사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 경제를 지키고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국민 달래기용 예산’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예산 투입에서 상당한 수준의 비효율과 낭비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런 비효율과 낭비는 어느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 비효율과 낭비를 핑계로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졸속으로 삭감하는 일은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정’도 아니고 ‘합리’도 아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뿌려주기식 보조금은 당연히 정리해야 한다. 벤처기업 육성은 산업부와 중소벤처기업부로 넘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과기정통부의 중소기업 육성이 뜨내기 브로커들만 잔뜩 키워놓은 현실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하다.
용산의 과학기술비서관에서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화려하게 취임한 조성경 제1차관의 언행도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나눠먹고 갈라먹는다는 ‘카르텔’에 대한 지적이 지난 연말의 ‘과학기술 원로 오찬 간담회’와 올해 연초의 ‘과학기술 영리더와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라는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의 답변은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과학기술비서관의 어설픈 관료주의적 예단을 정체도 분명치 않은 원로와 영리더에게 떠넘겨버린 것은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는 비겁한 발언이다.
이제 그런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원로와 영리더에게 과학기술계가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확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않고 섣부른 발언으로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의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 책임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 차관으로서 대통령께서 지시한 내용을 제때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는 차관의 답변도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망언이었다. 행정부 업무에 대한 사과를 굳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삼권분립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사과의 주체도 이상하다. 대통령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차관’이 아니라 ‘과학기술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 퇴행적인 국제협력에 대한 기대
국제협력과 인재양성에 2조8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결정도 정상이 아니다. 올해 국제협력 예산보다 무려 5배 가까이 늘어난 엄청난 규모다. 연구개발에서 국제협력 사업은 아무 준비도 없이 예산만 편성해놓으면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국제협력에 대한 과기정통부의 인식도 혼란스럽다. 과학자가 국제협력을 통해서 ‘세계 최고 기술을 만드는 선진 연구개발 현장을 체화(體化)해야 한다’는 조성경 제1차관이 취임사에서 밝힌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런 지적은 오래전에 수명이 끝나버린 패스트 팔로어 시대에나 어울렸던 낡고 퇴행적인 인식이다. 선진국의 최고 연구기관이 돈 보따리만 들고 가면 누구에게나 연구개발 현장을 체화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연구개발의 현장을 무시한 억지일 뿐이다.
중국의 활발한 국제협력을 부러워하는 듯한 혁신본부장의 발언도 위험한 것이다. 중국의 국제협력은 2008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밀어붙이기 시작한 ‘천인(千人)계획’의 결과다. 다른 나라의 유능한 과학자 1000명을 영입해서 중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꿈꾸겠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천문학적 규모였던 1인당 100만 위안(약 1억7000만원)의 ‘묻지마식’ 연구비를 쏟아부었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중국의 화려한 양적 성장이 바로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구비를 앞세운 중국의 국제협력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던 것도 아니다. 2020년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 학과장이었던 찰스 리버 교수가 중국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도 중국의 천인계획 탓이었다. 중국의 대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현금 지원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국익이 달린 기술을 중국에 넘겨줬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과학기술에서 국제협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연구개발의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퍼주기식’ 국제협력이 언제나 바람직한 것은 절대 아니다.
외국의 대학‧연구기관을 주관기관으로 인정하고 특허권까지 모두 넘겨주겠다는 전제로 시작하는 국제협력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 연구재단이 무작정 확대했던 박사후연구원 지원제도가 외국에서 열심히 노력했던 우리 학생들에게 오히려 독(毒)이 되었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퍼주기식 연구비에 욕심을 내는 과학자는 선진국의 최상급 연구자가 아니다. 오히려 선진국의 넉넉한 연구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2류와 3류 연구자들이 모여들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남의 연구 성과와 경험을 연구비를 대주고 얻어오겠다는 비겁한 욕심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는 기술패권 시대에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줄 초인류 기술을 확보할 수 없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존재 이유?
지난 반세기 동안 애써 다듬어왔던 우리의 과학기술 정책이 이제는 온전하게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부총리급 과학기술부가 그 시작이었다. 국가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총괄 조정기능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된 과학기술부 때문에 발생하는 부처간 갈등이 과학기술정책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돼버렸다. 결국 정부 조직에서 부총리급 과학기술부가 사라져버렸다. 교육과학기술부‧미래창조과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혼란스러운 변신을 거듭해야만 했다. 화려하게 등장한 혁신본부는 지금도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형편이다. 사방이 지뢰밭이고 모든 부처가 과기부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기재부는 과기부의 편성 권한을 가져오고 싶어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는 산업‧에너지‧원자력 정책을 두고 오래 전부터 고질적으로 충돌해왔다.
최근에는 바이오 산업을 두고 보건복지부와도 부딪치고 있고 기후 산업을 두고는 환경부와 영역이 겹친다. 과기부가 관리하던 기상청도 이제는 환경부의 산하기관이 돼버렸다. 과기부의 존재에 우호적인 부처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과학기술부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과기부가 과학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가 과기부를 살려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현실은 서둘러 바로잡아야 한다. 이제 과학자와 국민을 감동시키는 과학기술부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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