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속 피어난 연대…모로코 살리는 평범한 이들의 힘

김서영 기자 2023. 9. 1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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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마을 도로 좁고 낙석 위험에도
구호물자 실은 차량들 곳곳에 이동
SNS로 필요한 물품 정보 공유도
모로코를 강타한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12일(현지시간) 물을 길어 알하우즈주의 이재민 텐트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가 빨리 일하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모로코 타로우단트 청소년센터에서 자원봉사에 나선 한 21세 청년은 이같이 말했다. 강진이 덮친 모로코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팔 걷고 나서 정부의 공백을 채우고 있다고 11일(현지시간) CNN·가디언 등이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마라케시와 항구 도시 아가디르를 잇는 10번 국도는 지난 10일 일부 개방된 직후부터 구호 차량 행렬이 몰려들고 있다. 지진 피해 지역인 탈랏냐쿠브에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마라케시, 카사블랑카, 라바트, 탕헤르 등 모로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차량에는 매트리스와 옷, 생수 등이 쌓였있었다.

탈랏냐쿠브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마을로 도로가 좁고 낙석 위험이 있어 아직 진입이 여의치 않다. 마을 주민 약 3000명 중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차량 3대에 나눠 탄 청년 16명은 “온종일 운전해서 이곳에 왔다. 의복과 음식, 돈을 모아왔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이처럼 구호물자가 사람 손길을 타고 아틀라스 산맥 곳곳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모로코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마을과 필요한 물품의 목록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며 정보를 나누고 있다.

메디 아야시(22)는 구조 활동을 돕기 위해 마라케시에서 일하던 호텔을 그만두고 친구들과 타로우단트로 왔다. 그는 “지진과 그 이후 벌어진 비극을 보며 인생에서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산골로 식량을 날랐던 한 프랑스 사업자는 “비참함을 예상하고 갔으나 모로코의 연대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모로코 틴멜 지역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지진 발생 나흘째인 11일(현지시간) 구호 물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강진이 덮친 모로코 틴멜 지역의 한 주민이 11일(현지시간) 태어난 지 15일이 된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시민들의 풀뿌리 활동이 공식적인 정부 지원보다도 빠르게 이재민에게 도착하면서, 정부의 공백은 더 두드러지고 있다. 진입로가 막혀 고립된 산골 오지 계곡 인근 도로에서 노숙 중인 한 주민(24)은 “지나가는 이들이 음식과 담요를 줬지만,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며 “계곡의 마을들은 잊혔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또 다른 주민(40)도 “정부는 가장 큰 피해를 본 오지 마을이 아닌 더 큰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직도 시체가 잔해 속에 파묻힌 마을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진이 난 후 부모님을 찾아 탈랏냐쿠브로 달려온 한 남성은 “(정작) 주민들을 도와야 했던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완전히 배신”이라며 “정부가 우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꼈다. 심장에 칼이 꽂힌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지진 발생 이후 5일 차에 접어들면서 모로코 당국의 방점이 ‘생존자 구조’에서 ‘이재민 구호’로 넘어갔다는 진단이 나온다. 생존자를 찾을 확률이 높은 ‘골든 타임’이 지났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출동 신호만을 기다리던 전 세계 구조대원들은 절망감을 표하고 있다고 AP·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모로코 정부는 아직도 영국, 스페인 등 4개국의 지원만 수용한 상태다. 지난 2월 약 70개국의 지원을 즉각 받아들였던 튀르키예와는 대조적이다. 프랑스 구조대가 도울 의사를 밝힌 직후 곧바로 비행기를 탔더라면 지진 발생 24시간 이내로 피해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독일과 체코 구조대는 공항에 집결까지 했으나 귀가해야 했다.

프랑스 국경없는구조대 단장인 아르노 프레이스는 “ 나흘이 지난 지금 떠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리는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해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긴급하게 일하기 때문”이라며 “구조를 위해 훈련한 우리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비참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 구조대가 모여들면 혼선이 빚어진다’는 모로코 정부의 입장도 일부 일리는 있으나, 살려야 할 사람이 있을 때는 한시가 급하다고 강조했다.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가운데)이 12일(현지시간) 마라케시에서 지진으로 다친 환자를 만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모로코에선 현지인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헌혈에 동참하는 풍경이 이어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진 발생 이튿날인 지난 10일 마라케시 헌혈센터에 6000명 이상이 줄을 섰다. 가족들과 여행 중인 한 영국인은 “헌혈센터를 보고서는 (헌혈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로코인들은 무척이나 반겨줬다.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고 NYT에 말했다. ‘늑장 대응’ 비판을 받고 있는 국왕 무함마드 6세도 12일 마라케시 무함마드VI 대학 병원을 방문해 지진 생존자를 위로하고 헌혈했다.

지진 피해 지역에는 앞으로 며칠 동안 비가 예보돼, 아직 대피소가 마땅치 않은 이재민들이 추위와 습기로 고통받으리란 우려가 나온다. 모로코 정부는 12일 현재 사망자수가 2901명이라고 발표했다. 부상자수는 종전 대비 두 배 늘어난 5530명이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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